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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리아코알라 May 28. 2024

(입에 착 감기는)   단어나 문장을 반복한다

남편은 자신의 머릿속에는 단어의 소리가 없다고 했다. 모든 정보나 기억을 이미지로 저장하기에 머릿속의 혼잣말 같은 건 없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가끔 입에 착 감기는 단어를 듣거나, 느낌이 좋은 단어, 혹은 소리가 재밌다고 느껴지는 단어가 있으면 자주 입 밖으로 소리를 내어 반복한다.


얼마 전에 내가 무슨 얘기를 하다 "영어로는 시원하게 표현이 되지 않는데 그런 상황을 '정말 답답하다'고 할까?"라고 했다. 그러자 남편은 "답답"이란 단어의 소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부엌에 오고 가며 "답답", 거실에서 몇 시간 뒤에 나를 봤을 때도 "답답" 했다. 그냥 마음에 드는 단어는 그렇게 몇 번이든 반복해서 말하면 기분이 좋다고 했다.


예전에 영어 단어 중에 "avuncular"(어벙큘럴-삼촌 같은)이란 단어가 너무 재밌다고 몇 번이나 반복해서 말하길래 내가 하루종일 오며 가며 마주칠 때마다 "어벙큘럴!"라고 했더니 매번 너무 즐겁게 웃었다.


가끔은 불현듯 어떤 단어를 떠올리고는 자신이 왜 그 단어를 알고 있는지, 왜 그런 평생 쓰지도 못할 쓸데없는 단어나 정보를 많이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어쩌다 뜻은 알지 못하고 소리만 기억하고 있는 단어가 떠오르면 우리는 그 단어가 실제로 있는 단어인지, 무슨 뜻인지를 찾아보기도 한다. 만약 그 단어의 소리가 입에 착 감기면 그 단어를 여러 번 반복한다.




자폐아들이 반향어 (상대방이 한 말을 메아리처럼 그대로 따라 하는 것)를 자주 쓴다고 하는데 남편도 개별 단어뿐만 아니라 문장으로도 따라 하는 걸 좋아한다.


출근할 때 항상 이어폰을 끼고 가는데 블루투스로 연결되어 이어폰에서 "배터리가 충분합니다." 혹은 "배터리가 부족합니다" 등의 말을 하는 것 같다. (나는 끼고 들어본 적은 없으므로) 그럼 그는 항상 "배터리가 충분합니다.", "배터리가 부족합니다."는 식으로 따라 한다.


내가 "한 번에 너무 많이 먹지 마. 쪼금씩 쪼금씩 먹어." 하면 "너무 많이 먹지 마. 쪼금씩 쪼금씩"하고 따라 하고.


가끔은 과거의 비슷한 상황에서 내가 자주 했던 말들을 기억해서는 내가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천천히 해야지~", "혼자 가면 어떡해~~"같은 말을 하기도 한다. 물론 웃으며 장난처럼 하지만 그렇게 하는 걸 즐거워한다.


가끔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알아차리면서 "하하, 나는 정말 자폐가 맞나 보네. 왜 이렇게 나는 말을 따라 하지? 하하하" 한다.



정말 남편의 말처럼 자신은 이미지로 생각을 하기에,

뭔가를 내가 원하는 식으로 처리하고 기억하기 위해서

그걸 나와 같은 언어로 반복하며 강화하는 건 아닐까.

자신의 더욱 자연스러운 언어는 말보다는 이미지니까. 


이런 남편의 모습은 다른 사람이 주위에 있을 때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일상생활에서 거의 표시가 나지 않을 수 있는 아스퍼거스 정도의 자폐는 자신의 이런 현상을 사회가 이상하다고 여긴다는 걸 인식하면 얼마든지! 숨길 수 있다. 즉, 내가 그 신경다양인에게 그렇게 편한 대상이 아니라면 나는 그/그녀의 자폐스펙트럼 상의 본모습을 영원히 못 볼지도 모른다.


얼마 전 어떤 이는 자신의 삶이 로봇청소기를 사기 전과 그 후로 나뉜다고 했지만, 우리는 남편에게 자폐스펙트럼(ASD: Autism Spectrum Disorder)의 특징이 있다는 걸 알아차리기 전과 후로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다.


거기서 남편이 다시 한 단계 더 나아가 다른 이들에게 자신이 ASD가 있음을 거리낌 없이 말하기 시작하면서 삶의 질은 한층 더 높아졌다.


생각보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성향이 있는 경우도 많고, 사람들이 자신을 잘 이해해 주며, 자신의 어려움을 도와주려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더 이상 괜찮은 , 불안하지 않은 , 이해하는 척하지 않아도 되니 스트레스 지수가 전체적으로 많이 내려간 듯하다.


참, 다행이다!





#자폐증 #자폐스펙트럼 #ASD #신경다양성 #신경다양인 #반향어 #메아리 #단어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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