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돌 나들이 Sep 18. 2020

이름이 무엇입니까

오랜만에 서점에 갔다. 일과 관련된 책은 필요에 의한 책이므로 그다지 감동 없이, 고민 없이 인터넷에서 구매를 했다. 하지만 서점에 가서 무수히 많은 책 사이에서 내 눈에 띄는 책을 고르는 것은 또 다른 기쁨이다.



오늘은 산책을 다른 길로 갔다. 집에 와서 시간을 보니 두 시간 정도 걸렸지만 걸음 수는 두 시간 정도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꽤 긴 시간을 서점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책 두 권을 샀다. 이름만 들었던 바로 그 책 '82년생 김지영'과 87년 6월 항쟁을 담은 최규석 님의 '뜨거운 기억, 6월 민주항쟁 100℃'였다.


       


▲ '82년생 김지영'과 '섭씨 100도' 오랜만에 구입한 책. ⓒ 김은숙


 


먼저 펼친 것은 '82년생 김지영'이다. '난중일기'는 많이 알지만 정작 읽은 사람은 많지 않다. '82년생 김지영'은 나에게 그런 책이었다. 영화로도 나왔지만, 제목은 정말 자주 들었지만 정작 읽지 않았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 있기에 이 책을 읽는다고 SNS에 올리면 그렇게 집단 공격을 당하는 것일까.



책은 아주 얇다. 얇아서 그런지 책을 다 읽는 데에 시간은 많이 걸리지 않았다. 책을 덮는 순간 뭔가 마음이 무거워짐을 막을 수 없다. 내가 겪지 않았다고 해서 마음 놓을 수 없는 일들이 수두룩했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무서운 일들이 많았다. 특히 학원에서 단순히 익숙해진 자리에 앉고 밝은 표정으로 유인물을 건네 준 것을 좋아한다고 착각하고 쫓아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꽤 무서웠다. 이후의 주인공이 웃지 않게 된 것은 마음이 아프다. 후원금을 노리고 사기를 벌여 후원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지고 후원하는 사람이 줄어들게 한 사건들도 생각이 났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현실을 바꾸고자 하는 움직임을 별로 보이지 않는다. 김지영의 남편은 명절에 시댁에 가고 친정에 가는 문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또래 한국 남자들에 비해 감각도 생각도 젊던 회사 대표는 '화장실 몰래 카메라'와 인터넷 사진 공유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도 모든 것을 잃어야 하는 피해자보다 가해자가 작은 것을 하나라도 잃을까 걱정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서술자인 '나'의 경우에도 '김지영'의 담당 의사로서 주인공의 삶에 대해서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특히 아이가 있는 여자로 산다는 것이 알게 되었다(본문 170쪽)고 하지만 새로 직원을 뽑을 때는 바로 그 이유로 미혼을 뽑겠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안다고 하는 사람도 주체적으로, 적극적으로 변화를 만들어 내고자 하는 것보다는 현실 타협을 하는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런데 책을 읽는 내내 나의 관심은 줄곧 다른 데에 꽂혔다.



그것은 바로 '이름'이다. 주인공 김지영, 딸인 정지원, 김지영의 언니인 김은영, 주인공의 엄마인 오미숙, 친구인 차승연, 직장 동료인 김은실 팀장, 강혜수, 시누이인 정수현 등 이름이 나오는 등장인물은 모두 여자이다. 남아선호 사상으로 주인공의 남동생만을 챙기던 김지영의 할머니도 '고순분'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반면 남자 이름은 김지영의 남편인 정대현만 나온다. 이 책의 서술자인 '나'도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이름이 무엇인가. 그 사람의 정체성이다. 영화 '명자, 아끼꼬, 쏘냐'에는 한 여성이 겪은 역사가 고스란히 들어있다. '명자'일 때와 '아끼꼬'일 때가 다르고 '쏘냐'일 때 삶의 모습이 다르다. 다른 삶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 바로 이름이다. 



김춘수이 시 '꽃'에서 이름은 존재가 인식되는 순간 얻게되는 아주 중요한 것이다. 길가에 있는 풀들도 '닭의장풀, 괭이밥, 여뀌, 질경이, 쇠비름, 토끼풀, 명아주'처럼 이름을 갖게 되면 그 존재가 보이기 시작하며 다른 풀들과 구별된다.



그런데 남자 등장인물은 아버지, 남동생, 동료, 선배, 동아리 회장 등 주인공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만 열거될 뿐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비중 등이 고려되지 않는다. 



남자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왜 나오지 않을까. 나는 '족보'를 생각했다. 지금은 달라졌다고 하나 가문의 역사인 '족보'에 '딸'의 이름은 올라가지 못했었다. 딸의 이름대신 배우자인 '사위'와 자녀의 이름이 올라갔다 하니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존재였다. '82년생 김지영'에 남자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것은 지금껏 역사 속에서 이름 없는 존재였던 '여자'와 이름을 가진 존재였던 '남자'의 자리를 이 책에서나마 바꿔 보고자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이전글 '물'들이는 삶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