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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원 Apr 21. 2022

술을 안 마시니 좋은 점

금주 200일 기념일

  술을 안 마신 지 어느덧 200일이 지났다. 정확히 오늘로 201일째다. 


  술을 안 마시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는지 아직도 또렷하게 떠오르는 생각은 없지만, 이제는 술이 없는 일상이 조금도 어색하지가 않다. 대학 시절부터 서른 중반까지 늘 함께 해온, 때로는 고단한 일상을 위로해 주는 친구 같았고, 때로는 쥐구멍 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을 만큼의 부끄러움과 후회스러움을 안겨 주는 원수 같던 술과의 질긴 인연을 이제는 끊을 수 있을까?


  술을 한동안 안 마시니, 술을 마실 땐 놓치고 있었던 좋은 점들이 하나둘씩 떠오른다. 우선 가장 좋은 점은 아내와 다툴 일이, 정확히 말하면 아내에게 혼날 일이 많이 줄었다는 점이다. 연애 시절부터 지금까지 아내와 함께 해온 8년의 시간 동안 둘 사이에 크고 작은 다툼이 있었지만, 술을 마실 때 마시는 양과 속도를 절제하지 못하는 나의 잘못된 음주 습관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다툼이 많았다. 이제는 직장 회식에서,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술을 많이 마신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냉랭한 기운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참 좋다. 


  회식에 대한 스트레스도 많이 줄었다.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로 잠시 직장인들에게 자유를 선사했던 회식의 압박이 점점 다가오고 있지만, 술을 마시지 않는 이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회식은 직장 동료들과 함께 갖는 저녁자리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예전에는 회식 일정이 공지가 되면 그날이 다가오기 며칠 전부터 '그 자리에서 얼마나 많은 술을 마시게 될까?', '이번에는 필름이 끊기지 않고 맑은 정신으로 집에 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들로 머리를 가득 채우느라 일은 일대로 손에 안 잡히고, 신경은 신경대로 곤두서 있었는데, 이제는 그 불쾌한 감정들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참 좋다.


  쓸데없는 걱정, 불쾌한 감정들이 사라진 만큼 몸도 정신도 맑아진 느낌이 든다는 것은 술을 먹지 않은 후에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매력이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육아휴직으로 가뜩이나 움직일 기회가 적었던 작년, 심리적 피로감을 핑계로 저녁이면 한두 잔씩 아내와 나눠 마셨던 맥주는 고스란히 살이 되어 몸무게 앞자리가 두 개나 바뀐 마법을 선사했다. 그리고 늘 저녁이면 구름 위를 걷는 듯한 알코올 기운으로 가득했기에 정신이 맑을 새가 없었다. 일상에서 술이 없어지고 난 후, 아직도 원래 몸무게를 찾아가려면 갈 길이 한참 멀지만 미미하게나마 몸은 가벼워지고 있고, 머릿속은 20대 이후 나의 인생 그 어느 때보다 맑고 깨끗하다는 느낌이 든다. 


  술을 마시지 않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 중 하나는 저녁 시간이 보다 풍부한 즐길 거리로 채워진다는 점이다. 야식, 술과 어울리는 저녁 시간 즐길 거리는 그리 많지 않다. 기껏해야 넷플릭스로 영화 보기, 드라마 몰아보기 정도랄까? 술이 사라진 저녁 시간은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나 보다 다양한 즐길 거리로 풍성하게 채워졌다. 어떤 날에는 책을 읽기도 하고,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석사천 산책을 가거나 공지천 라이딩을 가기도 하고, 가끔씩은 이렇게 글도 쓰고, 아내와 오붓하게 앉아 이야기도 나누고…. 퇴근 후 즐길 거리가 이리도 많다는 것을 몸소 느낀 마당에 술로 인해 몽롱한 저녁시간을 보내고, 다음날 밀려오는 숙취와 아내, 딸내미의 따가운 눈총 속에서 보내는 일상을 다시 맞이하고 싶지는 않다.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데, 앞으로도 지금처럼 술이 일상에서 사라진 후에만 느낄 수 있는 평온하고 풍성한 나날을 보낼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술로 인해 사랑하는 나의 아내와 딸, 그리고 모든 소중한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는 모습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그리고 술이 비운 자리를 채운 다채로운 행복의 싹을 뽑아 버리고 아침이면 후회 속에서 맞이하는 단조로운 일상으로의 회귀는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이 있듯, 이제 술 없는 삶의 첫 발을 내디딘 시점에서 묵묵하게 지금의 행복한 기분, 좋은 감정들을 잘 돌아보며 앞으로의 발걸음도 즐겁게 내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 가족의 일상에 행복을 선사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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