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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원 May 19. 2023

쓰레기 버리기 참 힘들다

추억 담긴 러닝타워와 이별하기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것은 나의 단점 중 가장 치명적인 단점이다.


맥시멀리스트였던 내가 미니멀리스트 아내를 만난 후 물건을 사들이고, 언젠가 필요할 때를 위해 쟁여두는 습관은 많이 고쳤지만, 그래도 물건 버리기는 아직까지 나에게 너무 힘든 일이다. 특히나 그 물건이 나와 내 가족의 소중한 추억을 담고 있는 물건이라면 평소보다 버리기는 수백 배 더 힘들다.


오늘은 러닝타워를 버렸다. 


러닝타워에 얽힌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해솔이가 지금보다 더 어렸을 적, 엄마 아빠와 함께 주방에서 요리도 하고 설거지도 할 요량으로 쓸만한 물건을 열심히 검색하다 비용도 절약하고 뚝딱뚝딱 만들기 좋아하는 내 취향도 살려볼 겸 러닝타워를 직접 만들기로 했다. 해솔이는 아빠가 스텝스툴과 스툴에 자를 대고 선을 긋고, 신나게 나사못을 박으며 만들고 뿌듯해했던 그 러닝타워를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수없이 반복하는 사이 부쩍 자랐다.


딸내미와 함께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러닝타워


훌쩍 커버린 딸내미에게 러닝타워가 비좁기도 했고, 아이가 크면 클수록 나날이 늘어가는 안전성에 대한 의문 때문에 최근에 새로운 러닝타워를 구입했다. 그리고 추억이 가득 담긴 아빠표 수제 러닝타워는 안방에 있는 전신 거울 뒤로 몇 주간 몸을 숨겼다가 오늘에야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물건을 버릴 때마다 잘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나를 위해 아내는 대형폐기물 배출 스티커를 깜짝 선물로 준비했다. 이것저것 생각할 새도 없이 스티커를 러닝타워의 가장 잘 보이는 곳, 해솔이가 수도 없이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던, 까치발을 들고 서 있던 발판 자리에 붙였다. 그리고 해솔이의 손을 꼭 붙잡고 러닝타워와 작별을 고하러 1층으로 내려갔다.


"아빠 얘 어디 가는 거예요?" 


"아빠 얘 이제 빠이빠이 하는 거예요?"


정든 물건을 버리는 게 못내 아쉬웠는지. 해솔이는 함께 집을 나선 러닝타워가 왜 집 밖에 나왔는지 연신 물었다. 그리고 자기가 올라갈 수 있는지 다시 올라가 보겠다며 비좁은 틈으로 힘겹게 몸을 밀어 넣더니 러닝타워에 올라섰다. 평소에는 잘 찾지도 않다가 꼭 버릴 때가 되면 물건의 쓸모를 찾곤 하는 아빠의 모습을 쏙 빼닮은 해솔이를 보며 아쉬운 마음은 가라앉고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아빠 얘 왜 놓고 가요?


오랜 친구와 작별하듯 쓰레기장에 잘 보이는 곳에 러닝타워를 두고 해솔이와 함께 놀이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올 때만 해도, 쓰레기장에 러닝타워의 자리를 잡아둘 때만 해도 연신 발판과 다리를 어루만지며 작별인사를 하던 녀석. 놀이터에서 신나게 노는 사이 이별에 대한 생각은 온 데 간데 사라졌는지 머리가 땀으로 흠뻑 젖을 만큼 놀고 집에 들어와서 곤히 잠이 들었다.


쓸모는 없는데 버리기엔 아까운, 추억이 가득 담긴 물건들을 버릴 때면 기분이 참 묘하다. 시간이 지나면 어느덧 잊힐 테지만 그 물건에 얽힌 이야기, 우리 가족의 웃고 울었던 일상의 장면 속에서 함께 하곤 했던 물건들과의 작별은 그 속에 담긴 추억들마저 떠나보내는 것 같아 아쉬움이 배가 되는 것 같다(딱히 집에 모셔둔다고 해서 늘 추억을 떠올리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제 식구도 하나 늘어날 예정이고, 가뜩이나 좁은 집이 더더욱 북적이고 좁아질 것이기에 정든 물건과의 이별은 앞으로 잦아질 것 같다. 어차피 헤어질 물건들이라면 조금 더 쿨하게 보내주는 연습을 해도 좋을 것 같다. 내가 잘하는 자기 합리화로 물건을 버리는 이유를 멋지게 포장하든지, 아니면 물건을 버릴 때마다 물건에 얽힌 이야기를 글로 풀어보는 것도 물건에 대한 추억을 오래 지속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무슨 쓰레기 하나 버리면서 사람이 이렇게 감성적이 될까. 아빠가 되니 사람도 변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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