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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욥 May 23. 2024

한양굿 마스터리 무당 엄마

옥수동 현대아파트

 내가 기간제 교사를 하는 동안 느낀 것인데, 고등학교 1학년은 물론이고 3학년인 학생들도 대부분은 자신의 진로나 꿈을 결정하지 못한 학생들이 수두룩했다. 수능을 보고 대학에 들어가기 직전까지도 그 '진로'라는 놈을 정하지 못해서 자기 성적에 맞춰서 대학에 들어가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나 역시 고등학교를 들어갈 무렵, 똑같았다. 서울 오산 중학교를 다니면서 내 성적은 그리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은 어중간한 성적이었다. 그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내내 전학 다니기 바빠서 기초적인 학습을 모두 놓쳤다. 그래서 내게 기본기란 있을 수 없던 상태였고, 학교에서 배우는 공부하는 법 조차 잘 배우지 못했던 탓이다. 아니, 핑계다.

 그나마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뀔 무렵부터는 전학여행이 끝나면서 제대로 된 수업이라는 것을 들었지만 내 성적통지표에는 늘 ' 주의가 산만하여~ ' 라든가 ' 무슨무슨 과목의 기초 학습 능력이 다소 떨어지며~ '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녔다. 그래도 그나마 학원이라는 곳을 다녀서 어느 정도는 따라갈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고 예상해 본다.

 나는 내 성적을 내가 봐도 형편없었다. 초등학교에서 전학여행이 끝난 줄 알았는데 중학교로 진학해서 또 한 번의 전학을 했고, 내 공부의 흐름은 끊겼다. 중학교에서의 내 성적은 인문계로의 진학은 가능할 정도의 성적이었으나, 이 성적으로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을 하면 나는 그저 잘하는 애들의 뒷받침을 해주는 들러리 역할을 할 것이 뻔했다.

 그래서 중학교 3학년 내내 고민을 하다가 원서를 쓸 무렵 엄마의 신당으로 찾아갔다.

" 엄마. 나 덕수상고 갈래. "
" 뭐?? 안 돼!!! "

 엄마가 덕수 상고로 진학한다는 나의 말에 노발대발하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었다. 엄마는 자신의 아들에 대한 객관적 판단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우리 아들은 공부도 잘하고 똑똑한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의 진학 방향에 대해서 당연히 노발대발했다.

" 내 성적으로 지금 오산고 가면 분명히 애들 들러리나 할 거야. 차라리 덕수상고 가서 조금 더 열심히 해서 상위권에 들어가면 돼. "

 내 생각엔 그랬다. 오산고에 가서 아이들 들러리나 하기보단, 상경계열로 진학해서 지금보다 더 열심히 공부해서 상위권에 들어가고 싶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선우'라는 캐릭터는 평생을 엄마 말을 잘 듣는 아들로 살아오다가 마지막에 결혼할 시기가 되어 자기의 짝을 찾는 과정에서 딱 한번 자기 엄마의 주장을 기어코 꺾어 놓는다. 나 역시 여태까지 엄마가 짜준 계획대로 살아오다가 처음 엄마의 의견을 꺾으려 했다.

 며칠 간의 엄마와 나의 의견 충돌은 계속되었고, 결국엔 엄마는 내게 지고 말았다. 그때부터였는지 모르겠다. 여태까지 엄마가 때리면 때리는 대로 가만히 맞고, 울기만 했다. 우리 엄마는 아빠랑 이혼하고 나서 아빠 보란 듯이 아들을 제대로 잘 키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고 더불어 한 부모 가정이나 다름없는 이 가정에서 내가 어긋나게 살아가는 것을 극도로 걱정을 했다. 그래서 늘 나에게 훈계였다. 그래도 매번 훈계를 한다고 해서 매번 때리는 것은 아니었다. 엄마는 잘 때리지는 않았지만, 한번 흥분을 하면 성난 황소나 다름없었다.

 세탁소 옷걸이, 5가지 색으로 휘황찬란한 나일론 털과 플라스틱 안에 철심이 박혀있었던 먼지 떨이개,  흥분한 상태에서 이것도 저것도 없으면 어김없이 내 뺨으로 날아오던 엄마의 매서운 손. 이런 것들로 주로 맞았다.

 그중에서 세탁소 옷걸이는 참으로 매력 있는 매였다. 얼마나 힘이 센지 그걸 한 번에 한 일자로 구겨서 만든 다음 나의 몸 '아무 곳'이나 휘둘렀다. 그렇게 하면 그 철심(?)이 내 온몸에 착착 감기고 내 허벅지와 종아리 온 몸뚱이에 새파란 줄무늬가 예쁘게 꽃을 피운다.

 그런데 내가 엄마의 의견을 꺾어버린 이후로 엄마가 어느 날 또다시 흥분을 하면서 어김없이 손이 날아왔는데, 나는 나도 모르게 날아오는 엄마의 팔목을 '턱' 하고 잡았다.

" 하... 엄마. 그만 좀 때려. 언제까지 때릴 거야~ "
" 뭐?? 이...."

 처음으로 대들었다. 내 속으로는 엄청나게 떨렸지만 내 딴에는 떨지 않고 말한다고 했는데,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고 분명 오들오들 사시나무 떨어대는 목소리로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정말 그때 이후로 나에게 손찌검을 하지 않았다. 난 반대로 그때부터 점점 엄마에게 대들거나 반기를 들기 시작하였다. 그때부터 말이다.

한양굿 中 신장거리

 엄마는 이제 '한양굿'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뒤지지 않는 실력의 소유자가 되었다. 나중에 무당인 내 엄마가 어떻게 짧은 기간 동안 그만한 실력을 갖출 수 있었나 생각해 보니, 첫째는 엄마는 머리가 비상했다. 분명 공부를 잘하는 똑똑이와 다른 똑똑이였다. 둘째로는 굿에 푹 빠져서 4년 내내 오로지 '굿' 생각만 하며 엄마의 24시간은 오로지 '굿'으로만 가득 차있었다. 셋째, 타인 보다 일이 많았다. 아마 엄마의 일이 없고 다른 사람의 일이었으면 실전에서 그동안 공부한 것을 써먹기가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엄마는 엄마의 일이 많은 사람이었고, 본인 일이기 때문에 거꾸로 가는 굿이라도 실전에서 무조건 본인이 직접 해보면서 익혔다.

 그렇게 엄마는 무당, 그리고 여자로서는 정말 어마어마 한 돈을 짧은 기간에 벌어들였다.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 그러니까 우리 가족이 이태원으로 이사를 온 지 2년이 살짝 지났을 무렵에 내가 어렸을 때부터 그토록 꿈꾸던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것도 월세나 전세가 아닌 무려 '자가'로 말이다.

 이사를 온 곳은 옥수동의 한 아파트였다. 조금만 걸어가면 한강이 보이는 곳이었고, 집 앞에 1호선 옥수역이 있는 역세권 아파트였다.

 엄마는 안방에 방음공사를 하고 그곳에 신당을 차렸다. 아파트라서 이태원에서나 의정부에서 처럼 신당에서 '징' 같은 것을 두들기거나 시끄럽게 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나는 엄마가 그러거나 말거나 '아파트'에 산다는 자체가 너무나 좋았다.

 내가 다니는 고등학교는 옥수역에서 조금만 가면 있는 학교였다. 나는 늘 같은 위치에서 전철을 타고 학교를 가는데, 그런데 며칠 째 나처럼 늘 같은 위치에서 우리 학교 교복을 입고 가고 있는 학생이 있었다.

 교복의 상태로보나 명찰의 색깔로 보나 나와 같은 신입생인 것 같았다. 그 녀석은 나랑 키는 비슷해 보였는데, 마르지도 뚱뚱하지도 않은 체격이었지만 얼굴이나 손의 색깔이 허여멀건 했다. 꼭 백인 같아 보였다.

 나는 호기심에 그 녀석의 근처로 가서 곁눈 질로 그 녀석의 명찰을 흘겨보았다. 그 명찰에는 '박지원'이라고 쓰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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