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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욥 May 26. 2024

레로쉬 호텔 전문 사관학교

옥수동에서 중화동으로

Ai로 그린 상상 이미지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한 지도 몇 개월이 흘렀다. 그동안에 난 지원이와 무척이나 친해졌다. 매일 아침, 같은 자리에서 전철을 타는 그 녀석은 알고 보니 우리 반이었다. 그래서 하교도 같이 하자고 내가 먼저 권했고, 그러면서 급진적으로 친해졌다.

 그 녀석은 내가 옥수동 아파트에 산다는 것을 부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 녀석은 금호동에 산다는데, 아마도 아파트에 사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게도 마음을 나눌 친구라는 것이 생겼다는 것이다.

 하긴, 나는 어려서부터 전학을 많이 다니느라 친구도 없었고 친구를 사귀는 법 조차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지 중학교에서는 내 엄마가 무당이라며 내게 쌍욕을 날리던 그 말더듬이와 친구를 하는 바람에 또 친구에게 상처를 받았던 것이 거의 전부였다.

 중학교 3학년 들어서서는 우리 반에 타 지역에서 전학 온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와 친하게 되었고, 그 친구는 말더듬이와는 다르게 내 엄마가 무당이라는 것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그런 아이였다. 그래서 그 친구와 친하게 지내는 가보다 했더니 그로부터 몇 개월 후 서로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바람에 헤어지게 되어 또다시 내겐 친구가 없어진 것이다.

 지원이와 나는 학원이라는 곳 자체를 다니지 않았다. 우리 학교는 상경계열이라 일반 교과를 배우는 보습학원이나 이런 곳보다는 컴퓨터 자격증 학원을 더 많이 다녔는데, 나도 그 녀석도 거기엔 별 관심이 없었다.

 우리 엄마는 항상 내게 '너보다 더 나은 친구를 사귀어라.' 이렇게 말하곤 했는데, 지원이가 그랬다. 지원이는 성적으로 보나 뭘로 보나 나보다 조금 더 앞서 있었다.

 고등학교를 선택할 당시, 내가 덕수정보산업고등학교를 선택한 이유는 어중간한 내 성적으로 일반계를 가서 들러리를 하는 것보다 조금 더 공부를 열심히 하면 덕수고에서 상위권에 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건 나만의 큰 착각이었다. 그 당시 덕수고는 상경계열이었는데도 일반계열보다 성적이 더 우수한 학생들이 진학을 많이 했다. 나처럼 생각한 학생들이 많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런지 내 고등학교 1학년초 성적은 중위권에 그쳤다. 하지만 지원이는 항상 나보다 몇 등이나 더 앞서 있었다.

 그 녀석에 대한 열등감 때문이었을까? 죽어라 열심히 해서 반에서 7등까지 성적을 올려놓았더니만 그 녀석은 4등을 해버렸다.

" 야! 너 공부 안 했다며? "
" 응? 나 공부 안 했는데? "

 순전히 거짓말이었다. 공부를 안 했다는 그 녀석의 성적은 항상 나보다 상위권이었으니까. 뭐, 나중에 성인이 되어 우스갯소리를 하며 물어봤더니 본인도 뒤에서 내가 따라오니까 죽어라 했다고....

 우리 엄마는 가장 후회되는 것 중에 하나가 옥수도 아파트를 단 돈 2억대 중반에 팔아버렸다는 것이다. 아파트는 무당집으로서는 정말 최악의 장소였다. 무당집인 우리 집은 항상 손님이 왔다 갔다 해야 하고, 우리 엄마는 늘 손님이 오면 징을 치며 기도 내지는 축원을 드려야 했으니까 말이다. 아무리 방음 공사를 완벽히 했다고 하지만 늘 주변 이웃들이 컴플레인을 걸었다.

 그래서 옥수동에 들어간 지 단 몇 개월 만에 팔아버리고 서울 중랑구에 있는 중화동으로 이사를 갔다. 그것도 하필 사람들이 한참 축구로 미쳐 있을 2002년 6월에 말이다.

 엄마는 그 옥수동 아파트를 팔아버린 것이 정말 후회된다고 했다. 2억대 중반에 팔았던 그 옥수동 아파트는 지금은 20억을 호가하니....

 엄마는 중화동에 한 허름한 집을 사서 그 집을 다 허물고 집을 지었다.

" 가장 빨리 지어지는 집이 뭐예요? "

 엄마가 그렇게 물어보자 건축업자는 조립식 주택을 권유를 했고, 엄마는 중화동 40평 남짓 되는 땅에 2층짜리 조립식 주택을 지었고, 1층에는 신당을, 2층에는 살림집을 차렸다.

 엄마는 중화동으로 이사를 하고 나서는 아파트에 있을 때보다 더 자유롭게 축원을 드렸다. 게다가 무당이 1년에 1-2번씩 하는 '진작굿'이라는 것을 집에서 해버렸다. (매번 굿판을 집에서 열었던 것은 아니었고 '진작굿'만 집에서 하고, 평소에는 굿당으로 나갔다.)

 엄마는 굿판을 열면 주로 국악 악사를 기본적으로 3명을 부른다. 피리, 대금, 해금 악사님들이 그런 사람들인데 이들을 주로 3잽이라고 호칭한다. 중화동 집에서 장구와 제금(심벌즈 같이 생긴 국악기) 그리고 3잽이 악사를 불러 굿판을 열어도 주변에서 컴플레인 하나 없었다.

 아마도 동네가 시끄럽기는 아파트나 단독주택이나 똑같을 것이다. 그걸 대비해서 엄마는 이사를 오고 첫 굿판을 여는 날 출장 뷔페를 불러서 주변에 사는 이웃들을 모두 초대를 해서 먹였고, 굿판에서 통돼지 5마리를 올렸다가 그것을 모두 이웃들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굿판이 열릴 때면, 과일이라던가 떡 등을 모두 싸와서 주변 이웃들에게 퍼주었다. 특히 무당집은 늘 쌀이 넘쳐 나는데 그 쌀을 모아서 동사무소에 가져다주어 기부도 하면서 중화동에서 터를 잡아 나가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중화동 우리 집에서 1년에 1-2번 굿판을 열어도 주변 이웃들이 단 한 번도 컴플레인을 걸어오지 않았다.

 엄마의 굿 실력은 날이 가면 갈수록 업그레이드되었다. 노련해졌다고 표현을 하면 맞을 것 같다. 이제 막 굿을 배우는 애동제자들의 최대 고민은 굿판에서 '문서' 이외 손님들에게 도대체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하나를 고민을 많이 한다.

 그동안에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무당이 되었다고 해서 신이 무당의 몸에 실려서 신의 언어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신은 툭! 툭! 던져 주듯이 무당에게 던져 주면 그걸 무당이 캐치를 해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이제 갓 신을 받은 애동제자들은 이것이 과연 내 생각인지, 아니면 신이 던져준 그 무엇인지를 구별을 못하기 때문에 처음엔 누구나 '어버버' 댄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노련해지면 점차 신의 언어처럼 말하게 되고 막말로 손님을 가지고 놀 수 있을 정도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엄마가 그랬다. 이제는 노련한 모습으로 점상에서든 굿판에서든 손님을 마음대로 울렸다 웃겼다 할 수 있을 정도로 노련한 만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 역시 고등학교부터는 무당으로서의 엄마를 많이 접할 수 있었고, 엄마도 이제는 내게 그런 모습을 애써 감추거나 하지 않았다.

 엄마의 손님들에게 차 대접을 하거나, 말을 많이 하는 엄마에게 중간중간에 물을 떠다 준다거나, 또는 진작굿에서 내가 그 굿판의 손님이 되어 엄마의 공수를 듣는다거나 이러한 것들이 내게 허락되었다.

 엄마는 무당으로서는 정말 타고난 복이 있는 사람이었다. 사실, 무당 자체가 똑똑해야 무당을 하더라도 이른바 잘 나가는 무당이 되는 것인데, 엄마는 무당으로서 타고난 머리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엄마는 손님 복도 있었다. 손님이 하나 같이 다 엄마를 무당으로서, 그리고 한 사람으로서 존경을 한다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엄마가 갖고 있지 않은 복이 딱 한 가지가 있었다. 그건 바로 '신제자' 복이었다. 엄마가 그 정도의 위치까지 오기까지 수많은 제자가 있었다. 엄마의 성격이 너무나도 완벽함을 추구하는 스타일이고, 게으르거나 더러운 꼴을 못 보는 그런 엄한 스승이었다. 하지만 반면에 제자들이 돈에 허덕이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늘 제자들에게 돈을 퍼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런 완벽한 스승의 밑에서 너무나 힘들어했고, 하나 같이 전부 끝까지 가질 못하고 중도 포기를 하고 마는 제자들 뿐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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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무렵, 어느 날 엄마는 나를 앉혀 놓고 내 진로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엄마의 입에서 뜻밖의 이야기가 나왔다.

" 아들아. 너 혹시 호텔 쪽으로 관심 없니? "
" 호텔? 글쎄... 생각해 본 적은 있긴 하지만..."

 생각해 본 적이 있다는 내 말에 엄마는 안심을 하고 그날부터 끊임없이 호텔 경영 쪽으로 진로를 잡자고 설득을 했다. 그런데 엄마가 말하는 호텔 경영은 그냥 평범한 것이 아니라 스위스 호텔 유학을 가라는 것이었다.

' 레로쉬 호텔 전문 사관학교 '

 나도 엄마의 말을 듣고 충분히 생각을 한 끝에 '레로쉬 호텔 전문 사관학교'에 진학을 하기로 결심을 하고 수능도 모두 다 포기를 하고 오로지 영어 공부만 파고들었다.

 그렇게 3학년 내내 유학 준비를 모두 마쳤고, 이제 비자만 나오면 나는 스위스로 호텔 유학을 가게 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갑자기 청천벽력 같은 뉴스가 내 앞길을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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