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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욥 Jul 01. 2024

마지막 이야기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 님

 엄마의 장례식장은 정말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경험에 대해 아무런 지식도 경험도 없던 나는 그저 울기만 하고 있는 바보 중의 바보였다. 급한 대로 엄마의 주민증에 나와 있는 사진으로 영정사진을 만드니까 너무나 초라해 보였고, 그 영정사진 주위에 있는 꽃들도 가장 싼 것으로 맞춰졌다. 내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저 아무것도 몰랐다.


“ 아이고~ 숙아... ”


 엄마의 바로 윗 언니인 둘째 이모가 도착하고 나서야 엄마의 영정사진을 한복을 곱게 입은 진정 무당의 모습으로 되돌아갔고, 그 영정 사진 주변에 비싼 꽃들로 장식하게 되었다. 엄마의 장례는 내 손이 아닌 혁이 삼촌 손에 맡겨져 운영되었다.


 과학수사대가 와서 수사한 결과, 돌아가시기 전날 내가 달아 놓은 CCTV로 확인했더니 수면제를 드시고 소파에 누워 낮잠이 들어 깨어나시지 못했는데, 엄마가 주무시면서 자기도 모르게 구역질을 했고 토사물이 나왔다가 다시 목구멍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수면제의 기운 때문에 일어나지도 못하고 기도가 막혀 돌아가셨다는 추측으로 결론을 내었다.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한 순간에 사람이 이렇게 갈 수도 있는가? 57세가 얼마나 많은 나이라고 고작 수면제 하나 때문에 돌아가시다니, 그 순간 내 머릿속엔 문득 엄마가 늘 해왔던 말이 생각났다.


‘ 내가 올 해만 넘기면 장수하는데~ ’


 엄마는 그게 자기 자신에 대한 예언인 줄도 모르고 돌아가신 것이다. 엄마의 말대로 올해가 가기 1달 전인 막달을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허망하다. 허망해. 나는 엄마의 영정 앞에서 멍하니 계속 그러고만 있었다. 눈물은 그렇게 많이 나지 않았다. 실감이 나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그 급박한 상황에도 서 있던 이모를 앉히고, 삼촌에게 운전 중이냐고 물을 만큼 멘털이 강해서일까?


 곧 외삼촌들과 첫째 이모도 도착했고, 나 역시 정신을 차리고 내 친구나 지인들에게 알렸고, 엄마의 손님들에게도 알렸다. 그때 내가 느낀 것은 ‘대한민국에서 무당이라는 직업은 하지 말아야 할 외롭고 고독한 직업이구나’라고 느꼈다.


 엄마의 손님들에게 알리자 몇몇의 손님들은 오긴 했지만, 대부분의 손님들은 엄마의 사망 소식을 듣고 알았다며 전화를 끊긴 했는데 정작 장례식장에는 오지 않았다.


“ 재성아. 미안. 너도 알잖아. 상문살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

“ 네. 알았어요. ”


 대부분의 손님들은 장례식장에 함부로 오면 낀다는 상문살 때문에 오길 꺼려했고, 특히나 무당의 장례식이라니까 더더욱 꺼려했다. 안 그래도 안 좋은 기운이 붙을 까봐 걱정인데, 무당의 장례식이라 더 안 좋은 기운이 자신들에게 들러붙을까 봐 오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엄마의 장례식을 채운 것은 친지들, 소수의 엄마 손님들, 내 손님들, 그리고 엄마의 학교 동창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상문살 따위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거나 엄마가 무당이라는 사실을 별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뿐이었다.


 나는 평생 엄마가 무당으로서는 대한민국 최고라고 여기며 살아왔다. 그런데 대한민국 최고의 무당 장례식은 너무나도 초라하기 그지없었고, 외로웠으며, 고독했다. 그래도 그나마 엄마의 친구들이 많이 와서 북적여주며 나를 위로해 주고 엄마를 추모해 주었다.


 나는 잠깐 장례식장을 빠져나와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엄마 돌아가셨어요. ”

“ 그... 그래? ”


 아빠는 그러고도 한참을 말이 없었다. 나는 그 짧은 말이 없는 동안에 아빠도 이런 순간에는 엄마를 위해 슬퍼해주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그 잠깐의 공백이 있고 이어지는 아빠의 말은 내 가슴을, 내 심장을 정확히 칼로 찌르는 것 같았다.


“ 내가 가야 하니? ”


 아빠의 그 소리를 듣고 나는 ‘예?’하고 대답조차 못했다. 너무나도 어이가 없었다. 장례식장은 죽은 이를 추모를 하러 오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남겨진 사람을 위로하러 오는 공간이 아니었던가? 내게는 이제 유일하게 남은 혈육이면서, 자기한테는 유일하게 홀로 남은 아들이면서 그런 아버지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이렇다니, 아빠가 그런 소리를 하고 나서 ‘앗!’하는 그 0.1초의 찰나의 순간에 바로 대답을 했다.


“ 알았어요. 됐어요. 오지 마세요. ” 뚝.


 엄마의 영정 앞에서도 잘 나지 않던 눈물이 그제야 쏟아져 내렸다. 너무나도 서러웠다. 우리 가족이 왜 이렇게 됐는지, 이럴 거면 왜 나를 낳아서 이런 일을 겪도록 만드는지 엄마도, 아빠도 원망스러웠다.


 엄마의 장례식은 이런 일 따위는 이벤트라고 할 수 없을 만큼의 또 다른 이벤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빠와 그런 통화를 하고 나니 아직 관두지 못한 학교에서 교장선생님과 다른 선생님들, 그리고 우리 반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왔고, 그들이 엄마가 무당인 줄 몰랐기에 엄마의 영정 앞에 앉아서 찬송가를 부르며 예배와 기도를 했다. 아마 그들은 다른 식구들이 엄마가 교회를 다닌다는 것이 싫어서 예배 자체를 조심스럽게 해야 하는 분위기라고 생각이 되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들이 돌아가고 엄마의 영정 앞에서 웃음 아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훗... 우리 엄마 예배도 다 보고... 얄궂네...”


 그리고 늦은 저녁, 장례식장은 한창 손님들로 시끄러웠다. 나는 내가 이런 일을 당하고 나서야 왜 우리나라 장례 문화 중에서 사람들이 장례식장에서 시끄럽게 떠들고 그러는지 몸소 느끼게 되는 일이 발생했다.


 명절이나 외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제사 때 외가 가족들은 모이기만 하면 서로 헐뜯고 욕하고 싸워댔는데, 아니나 다를까 셋째 삼촌과 혁이 삼촌의 5번째 마누라와 싸움이 붙은 것이다. 


“ 어디 첩년 따위가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 와서는 지랄이야? 엉? ”

“ 첩년이요? 아주버니 말 다했어요 지금? ”


 혁이 삼촌은 형님에 대한 예의가 깍듯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기 마누라와 형님이 싸우는데도 그저 아무 말 없이 술만 먹고 있었다. 그 싸움은 더더욱 크게 번졌고, 장례식장에 있던 내 손님들, 엄마의 친구들, 그리고 손님들까지 전부 그들을 피해 집에 가버렸다.


 정말 너무했다. 그 손님들이 가고 나니 정말 장례식장이 아무도 없이 텅텅 빈 곳으로 변해버렸고 고독한 가운데 더욱 고독하게 만들어버렸다.


 나는 속으로 끓어오르는 화를 겨우겨우 참고 누르고 그저 엄마의 영정 앞에서 하염없이 목 놓아 울기만 했다. 그러고 나서부터는 정말 엄마의 형제들 말고는 장례식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분위기가 더욱 나를 화나게 했고, 더욱 슬프게 했으며, 더욱 고독하게 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번엔 셋째 삼촌의 아들과 혁이 삼촌이 한판 붙은 것이다. 그 형은 혁이 삼촌에게 이 새끼 저 새끼 하면서 쌍욕을 퍼부어 댔고, 금방이라도 서로 치고받고 할 참이었다.


 또 참았다. 엄마의 영정사진 앞에서 나까지 폭발할 순 없었기에 그냥 나 스스로 부처가 되기로 결심한 듯 꾹꾹 눌러 참았다. 그렇게 또 한 바탕의 싸움이 있고, 이제 조용하겠거니 했더니 또 한 번의 싸움이 난 것이다.


 이번엔 자매 중에 첫째 이모의 늦게 도착한 아들과 혁이 삼촌이 싸움이 붙은 것이다. 나는 그들의 싸움을 보고 도저히 참을 길이 없었다. 


“ 에이 ㅆ발 것들이 진짜!! ”

 나는 폭발해서 장례식장의 상들을 다 때려 부숴버렸다. 


“ 니들이 사람 새끼들이야? 장례식장에서 이게 뭐 하는 짓거리야!! 손님들 다 내쫓고!! ”


 내가 참지 못하고 그렇게 폭발하자 그 첫째 이모의 아들이 되려 내게 큰소리쳤다.

“ 야!! 너만 슬퍼? 너만 슬프냐고?? ”


 나는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 알았으니까. 다 필요 없으니까. 다 꺼져. 죽여버리기 전에 다 꺼지라고. ”


 내가 그렇게 나가자 그 형은 자기가 화가 나서 되돌아갔고, 둘째 이모가 내게 와서 그들에게 쌍욕을 해대면서 위로를 해주었다. 나는 엄마의 영정 앞에서 정말 크게 목 놓아 울어버렸다. 엄마가 너무나 불쌍했다. 아들이 장가가는 꼴도 못 보고, 그리고 올해 겨울에 일본으로 첫 해외여행을 가보자는 약속도 지키지도 못한 점이 계속 나를 괴롭혀서 얼마나 울어댔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엄마의 외롭고 쓸쓸한 장례식은 끝이 났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남들처럼 집에만 콕 처박혀서 슬퍼만 할 수 없었다. 이 세상에 나 하나밖에 없었으니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의 뒤처리는 오로지 내 몫이었기 때문이다. 


 엄마의 재산을 정리하는 일, 그리고 엄마의 유언을 지키는 일과 가장 큰 일은 내가 엄마 없이 홀로 서는 일이 제일 시급했다.


 엄마의 재정 상태는 사실 말이 아니었다. 주변 신도들에게 갚아야 할 돈이 많았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엄마가 돌아가시기 정확히 한 달 전, 혁이 삼촌의 아들이 첫 직장으로 보험회사에 들어갔다고 해서 55만 원짜리 보험을 들어주었는데, 그 보험을 1달을 붓고 엄마가 돌아가신 것이다. 그래서 거금이 나온 적이 있었는데, 내가 그 아들에게 고맙다면서 백만 원 자리 수표 세장과 30만 원짜리 연금, 24만 원짜리와 14만 원짜리 보험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돈으로 엄마의 빚을 갚는데 써버렸다. 나는 살아야 했다. 그런데 나 자신은 생각보다 무능력했다. 엄마 없이 홀로 서는데 막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눈을 씻고 봐도 별로 없었다.


 학교에 기간제 교사라도 하기 위해서 여기저기에 이력서를 넣어봤지만, 죄다 나 같은 경력 없는 신입 기간제 선생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길 6개월 지나갈 무렵까지도 나는 계속 앉아서 돈만 까먹고 있는 철없는 백수가 되어 있었다.


 엄마의 빈자리는 점점 크게 느껴졌다. 처음엔 엄마가 죽었다는 것이 실감조차 나질 않다가 한 달이 지나도, 반년이 지나도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둘째 이모로부터 전화가 왔다.

- 야. 너희 엄마가 했던 공수가 맞았다. 어쩌면 좋으니...


 그러면서 울면서 전화가 온 것이다.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엄마가 돌아가신 지 6개월 만에 도 제일 큰 외삼촌이 심장마비로 급사하셨다는 것이다. 그제야 혁이 삼촌과 셋째 삼촌이 엄마가 살아생전 했던 말을 듣고, 큰 외삼촌의 산소를 만들면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산소를 파보니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뼈들이 물에 둥둥 떠있었더랬다. 엄마의 공수가 들어맞은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둘째 외삼촌이 간암으로 돌아가시고, 그로부터 6개월 뒤 엄마가 돌아가셨고, 또 그로부터 정확히 6개월 만에 큰 외삼촌이 돌아가시는 줄초상이 난 것이다.


 셋째 삼촌과 혁이 삼촌은 그제야 엄마의 공수를 생각하며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다시 산소 정리를 하셨다고 했다. 그런데 그들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했다.


 큰 외삼촌의 장례를 정리하고 나서 둘째 이모가 내게 와서 성질을 내며 씩씩 대기에 물어봤더니, 큰 외삼촌의 장례식장에서 셋째 삼촌과 큰 이모가 옹기종기 모여서 또 내 욕을 했다는 것이다. 재성이는 이제 엄마가 없으니 사람이 되느니 못 되느니 하며 둘째 이모에게도 재성이한테 들러붙어서 뭐 얻어먹을 거 있나 하지 말라고 그랬다는 것이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어이가 없었다. 자기네들이 나를 얼마나 봤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지, 평생 가봐야 1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했던 사람들의 입에서 내가 없다고 욕이라니 말이다. 


 나는 그런 것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그저 남이려니 생각하고 살려고 했다. 그런데 또다시 날 건드는 사건이 있었다.


 사실 혁이네 삼촌 아들이 몇 달 전, 내게 1백만 원을 빌려 간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걸 혁이 삼촌이 알게 되었고 우스갯소리로 걱정 말라며 자기가 갚아준다고 그랬던 사건이 있었다. 나 역시 백만 원이 큰돈도 아니고 구태여 받아낼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명절, 둘째 이모네 혁이네 삼촌과 내가 놀러 갔고,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무렵, 내가 농담조로 삼촌이 갚아준다던 백만 원 언제 갚아줄 거냐고 물어봤다. 그런데 그 삼촌이 내 말을 듣고 노발대발 난리가 난 것이다.


“ 야!! 그럼 내가 농담으로 ‘내가 너 집 사줄게!’ 그러면 사줘야 하니? ”

 이런 어이없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이 더 이상했다.


“ 야!! 그리고 막말로!! 니가 누구 때문에 그 큰 보험금을 타 먹었는데!! 겨우 돈 3백이 말이 되냐? 어?? 적어도 10%는 줘야지? 니가 인간이냐? ”


 아, 돈에 환장한 사람들. 그 누가 보험금을 탔다고 딜러에게 10%를 주는 사람이 있던가? 그래도 사촌 동생이라 수표 3백만 원과 30만 원, 24만 원, 14만 원짜리 보험 3개를 들어줬건만 그런 소리를 내게 싸지르고 있는 것이다. 


 나도 그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면서 혁이 삼촌에게 다시 쌍욕을 퍼부어대고 그 집을 나왔다. 그렇게 외갓집 식구들과도 그 사건을 마지막으로 두 번 다시 왕래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너무나 형편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엄마는 내 나이 때 김 장사를 하며, 무당을 하며 수천, 수억 원을 벌었는데, 나는 이제 겨우겨우 경기도 연천 별장 근처의 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를 구하기에 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끝이 있는 직장이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내 삶은 피폐해져 갔다. 


‘ 내 삶이 좀 더 안정이 되면 성당엘 가야지...’


 나는 지금 당장 누군가 기댈 곳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렇다고 교회엔 죽어도 가기 싫었다. 누군가 교회의 하나님이나 천주교의 하느님이나 매한가지의 신이다.라고 그랬지만, 내게는 교회의 하나님은 우리 엄마가 무당이라고 내게서 뺏어가 버린 신이었기에 죽어도 가기 싫었다. 그래도 엄마가 생전에 천주교는 괜찮다 했으니까, 내 삶이 안정이 되면.... 그때가 되면 가야지. 가야지. 가야지. 다짐했다.


 하지만 내 삶은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도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날이 가면 갈수록 나는 더욱 망가져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생각이 들었다. 하느님께 내 삶이 안정되면 갈 게 아니라, 지금 가서 내 삶을 온전히 맡겨드려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 저... 성당엘 다니고 싶어서 왔는데요. ”


 그래서 처음 간 연천군의 전곡 성당. 나는 성당 마당에 있는 성모마리아 상 앞에 우두커니 앉았다. 마치 엄마를 잃은 나를 ‘엄마’의 위치에서 위로해 줄 것 같았고, 자신의 아들인 예수님께 나 대신 울어주며 기도를 해줄 것 같았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 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 되시나이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 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나는 아직도 벼랑 끝에 서 있다. 하지만 하느님이 내 옷자락을 붙잡고 뛰어내리지 못하게 막고 계시다.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있고, 내 옷자락을 잡고 계신 하느님께 온전히 나를 맡길 수도 있다.     


 선택을 해야지. 이 고독하고 외로운 그리고 고된 싸움에서 이길 것인가? 아니면 지고 말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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