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모씨 Mar 13. 2021

샤넬백 보다 뜨개 가방이 좋은 이유

우울증 공황장애 환자의 치료일지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지인이 전화가 온 적이 있다. 그녀는 자신의 월급이 너무 적다고 나에게 한탄했다. 이 월급 받으려고 공부한 게 아닌데, 월급이 적다고 말했다. 그녀를 최근에 직접 만나게 된 건 다른 지인의 결혼식에서였다. 그녀의 손에는 샤넬백이 들려있었다.


명품 가방에 대한 욕심이나 선망은 전혀 없었다. 내가 가지고 있어도 관리를 제대로 못할 거 같아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일하러 갈 때는 정말 말 그대로 '똥 묻어도 되는' 옷만 입는지라, 명품 가방이 있어도 들고 다닐 데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도 사람이라 예쁜 게 좋긴 한데, 이게 진짜 예쁜 건지 다른 사람들이 예쁘다고 해서 예쁜 건지 항상 긴가민가 했다.


그런데 사촌언니의 결혼식에 다녀온 언니는 자신만 명품 가방이 없다고, 본인보다 어린 사촌 동생도 '구찌'가방을 드는데 나만 명품이 없다며 펑펑 운 적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하나둘씩 결혼하는 동기들 결혼식 자리에 등장하는 명품가방을 보고, 백화점에서 다들 들고 다니는 명품 가방을 보고, 나도 하나 있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지레 들었다.


그래서 잠이 오지 않는 어느 날 밤, 나는 다들 외치는 '샤넬 백' 이 얼만지 검색해봤다.

가로 20센티 밖에 안 되는 가방이 5백만 원이었다. 심지어 샤넬 가방은 없어서 못 산다고, 다들 오픈 시간에 맞춰서 줄을 서서 사야 하는 거라고 했다. 깜짝 놀랐다.


내 월급은 요만한데, 내가 월급을 적게 받는 편 도 아닌데, 나는 못 살 거 같은데, 아니 중고차 한 대 가격인데 차는 타고 다닐 수라도 있는데 가방은 타고 다닐 수도 없는데, 다들 어떤 마음을 먹고사는 걸까? 싶었다. 백화점에 수많은 명품 가방들이 달리 보이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사야 하나, 하나쯤은 나도 있어야 하나 싶어 고민했다. 이번 연도 성과급에 돈을 보태서 나도 가방을 사야 하나 했다.


그러다 최근에 뜨개질을 시작하면서, 사야 하나 고민했던 샤넬백을 포기했다. 나에겐 샤넬백 보다 뜨개 가방이 더 값져 보였기 때문이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몇 백 년의 브랜드 가치보다 나의 정성이 다 커 보였다.


내가 가방을 뜨기 시작한 건 어느 정도 뜨개질이 손에 익기 시작했을 때부터이다. 나는 물건은 항상 쓸모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디 실용성이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하고 고민하다가 가방을 뜨기 시작했다.


뜨개질은 일종의 과학이다. 어떻게 뜨느냐에 따라 코의 모양이며 길이가 정해지는데, 이를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무늬가 나온다. 거기에다 무늬가 균형 잡히게 자리하도록 균형을 잡는 일도 필요하다.


그렇게 열중해서 뜨개질을 하다 보면,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고 오로지 어디에 있는 코에 몇 번의 짧은 뜨기를 해야 하는지만 생각하게 된다. 이 무아지경의 경지에 이르면, 커져가는 편물을 보며 희열을 느끼게 된다.'이런 무늬가 나오겠군.' 하고 예상을 하고 뜨개질을 하고, 결괏값이 잘 나오면 아주 기뻤다.


뜨개질의 기쁨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내가 신나게 뜬 가방을 남들에게 선물할 때,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사람들을 보며 기분이 좋았다. 칭찬을 받아서 기분이 좋았다.

내가 재밌어하는 일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도 받고, 실용적인 걸 선물해준다니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 비록 몇 백 년 동안 브랜드를 지켜온 디자이너의 디자인과 장인의 솜씨로 한 땀 한 땀 꿰맨 소가죽, 양가죽 가방에 비하면 서툴고 조잡하지만 무언갈 완성하는 기분은 명품 가방을 살 수 있는 돈을 주고도 구매할 수 없을 거 같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재밌는 게 없는 상태로 지내왔다. 세상만사에 흥미가 없었고, 재밌는 일도 없었고, 해 보고 싶은 것도 없었다.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더 겪어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내 삶 앞에 기다리는 건 죽음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퇴근하고 집에 가서 가방을 완성할 걸 생각하니 해야 할 게 있으니 생활에 활력이 돌았다. 하고 싶은 게 생기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싶었다.


(비록 어깨는 두 짝밖에 없는데 가방을 몇 개나 만드는 거냐는 핀잔을 듣긴 했지만. 도대체 실이 어디서 자꾸 나오느냐는 이야기도 들었다.)


최근에는 내 가방을 떴다. 여태 가방을 대여섯 개 만들었는데, 내 가방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보리색 실로 아이패드가 딱 들어갈만한, 내가 정한 치수대로 만들었다. 무늬가 풍차처럼 들어가 있는 가방인데, 봄바람이 불어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태 내 삶을 돌아보면, 항상 누군가에게 휘둘렸던 거 같다. 가족들에게 휘둘리고, 친구들에게 휘둘리고, 동료들에게 휘둘리고, 연인에게 휘둘렸다. 즉, 다른 사람의 생각에 내 생각이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뜨개질을 하며 '내 생각'대로 만들어지는 편물을 보고 기분이 좋은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주체가 되어 내 생각대로 무언가 이루어진다는 게 생소하긴 하지만 뿌듯하다.


언제 다시 억 소리 나는 명품 가방을 사야 하나 고민하는 날이 올진 모르겠지만, 당장은 서툴게 엮은 뜨개 가방이 더 좋다.

이전 02화 당신의 슬픔의 깊이는 몇 m 인가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