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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모씨 Mar 04. 2021

30만 원짜리 머리를 했다.

우울증 공황장애 환자의 치료일지

"와, 너무 예쁘고 세련됐어요! 머리가 정말 잘 나왔네요."

"그런 것 같아요."

나는 난생처음으로 미용사의 말에 동의했다. 


나는 미용실에 가는 게 그렇게 싫었다. 가면 돈을 너무 많이 써야 했고, 항상 무슨 머리를 하든 간에 나는 별로 예뻐 보이지 않았다. 돈 쓰고 '그저 그런' 머리를 항상 한다는 게 불만이었다. 의자에 계속 앉아있는 것도 싫었고, 나에 관해 궁금해하며 말을 붙여오는 미용사가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일 년에 많으면 두 번, 대게는 한 번 미용실에 갔다. 일 년에 한 번씩 긴 머리카락을 단발로 자르고, 스트레이트를 하고 왔다. 그러고 나서 1년 동안 또 머리카락을 왕창 기르고 왕창 잘라냈다. 나에게 미용실이란, 마치 꼭 지내야 하지만 지내기는 귀찮은 집안 제사와 같은 연례 의식과도 같은 것이었다.


첫 번째 직장에서 퇴사를 하고 난 뒤, 처음으로 머리에 '파마'를 해봤다. 꼬불꼬불한 세팅을 처음으로 넣어본 것이다. 마음에 들었었는데, 집에 갈 때마다 긴 머리카락이 빠지는 걸 보고 엄마랑 언니는 언제쯤 머리를 자를 거냐고 계속 물어봤고, 너무 화가 났던 나는 머리를 한 지 석 달이 되지 않아 머리를 단발로 싹둑 잘라 버렸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의 병세는 악화되기도 하고, 완화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는 만큼 머리카락도 길었고, 머리를 자른 지 일 년이 훌쩍 넘어버렸다. 곱슬기가 있는 내 머리카락은 지저분하게 이마 위에서 흩어졌다. 그런데 어차피 일을 머리를 묶기 때문에, 머리카락을 정돈해야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만 채로 한참을 지냈다.


그러다 큰 계기가 생겼다. 연말 정산 환급금을 받게 된 것이다. 조삼모사이긴 하지만, 그래도 돈이 들어온다는데 이 '공돈'을 나를 위해 투자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옷을 사볼까? 미용실에 가볼까? 우량 주식을 사볼까? 하다가 내가 내린 결론은 '평생 해본 적 없는 일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압구정에 위치한 비싼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했다. 그것도 이번엔 단발로 자르지 않았다. 긴 머리에다 파마를 해봤다.

미용사한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나는 미용실에 앉아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미용실에 와서 한 번도 만족해 본 적이 없고, 항상 '했구나.' 하는 정도에서 끝났다고 했다. 그랬더니 미용사는 머릿결을 좋아 보이게 펌을 하겠다고 한 뒤 빠르게 시술을 해줬다. 10시 반에 도착해서 13시가 되기 전에 미용실에서 나올 수 있었다. 금액은 30만 원이었다. 그것도 첫 방문이라 할인을 많이 해준 거라고 했다. 속으로 '뜨악'을 외쳤지만 태연한 척했다. 


미용사는 연거푸 나에게 '예쁘게 됐다.'라고 이야기했고 나도 얼핏 본 내 모습이 낯설기는 하지만, 마음에 들었다. 잡지에서 보던 머리가 진짜로 내 머리가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미용사가 보여준 사진대로 머리가 됐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계산을 치르고 집에 와서 다시 거울을 봤다. 새로 머리를 해서 조금은 어색한 내가 있었다.


나는 원래 거울을 보는걸 썩 좋아하지 않는다. 내 생김새에 대해서 그다지 만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에 대한 불만은 나의 성격부터 외모까지 모든 방면을 아우르는데, 외모의 경우 눈에 보이다 보니 특히 내 마음에 안 들 때가 많았다. 나는 너무 뚱뚱하다고 생각했고, 얼굴이 넙데데했고, 머리카락은 곱슬이어서 중구난방이었고, 양쪽 눈은 짝짝이 었다.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머리카락만큼은 내가 예쁘다고 생각했던 사진 속 모습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앞머리도 자연스럽게 넘어갔고, 머릿결도 찰랑찰랑해 보였다. 거울을 보면서 '머리가 참 예쁘네' 하고 생각한 뒤 깜짝 놀랐다. 내가 나 자신을 예쁘다고 생각하는 날이 오는구나. 싶었다.


나는 한 달 생활비가 15만 원이다. 그런데 미용실에서 이번에 30만 원을 썼다. 밥 한 끼 사 먹는 것도 고민을 하다가 사 먹는 나인데, 굉장히 과감한 투자를 했다. 거기에다 내 머리 모양이 바뀌든 안 바뀌든 간에 다른 사람들은 별로 신경도 안 쓸 텐데, 나 자신만을 위해서 지출했다. 결과는 다행스럽게도 만족스러웠다. 비록 갈 곳은 회사밖에 없지만, 회사에선 머리를 묶어야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흥청망청 내가 버는 돈을 나를 위해서 다 소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이야기하지는 않겠다. 그렇지만 날 위해 돈을 쓴다는 것이 나에겐 정말 새로운 일이었다. 모든 일에 원인과 결과가 명확하게 드러나야 한다고 여기는 나인데, 헤어 스타일이라는 불확실하고 일시적인 것에 이렇게 까지 투자를 할 수 있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마음속에 여유가 생겼구나, 살만해졌구나, 괜찮아졌구나, 생각했다.


병원에 가서 이야기했다.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했는데, 처음으로 기분이 좋았다. 했다. 선생님은 웃으시면서 좋은 일 하셨네요. 하셨다. 돈을 많이 써서 좋은 일을 하게 된 걸까? 아니면 내가 나에게 좀 더 너그러워져서 나 자신을 마음에 들어하게 된 걸까? 아무튼간에 내 인생에 이렇게 좋은 일이 더 생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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