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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모씨 Mar 11. 2021

당신의 슬픔의 깊이는 몇 m 인가요

우울증 공황장애 환자의 치료일지

청년 구직활동 지원금을 받을 때 이야기다. 구직 활동 지원금을 받기 위해서 연계 기관에서 자소서 첨삭도 받고, 심리상담도 받았었다. 심리상담은 처음이었는데, 병원에서도 격려해주셔서 시작해보기로 했다. 5회였나, 받아 볼 수 있었는데 의사 선생님은 그 정도로는 택도 없다고 하셨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니까 한 번 해보라고 하셨다.


심리상담을 시작하면서, 내가 생각하던 심리 상담과는 다르다는 걸 알게 됐다. 치료 중인 나를 인정해주고 약물 치료와 심리 치료를 병행한다고 생각했는데, 상담가 선생님은 약물 치료에 대해서 부정적이셨다.


전 세계를 기준으로 했을 때, 1부터 10까지 내 불행의 정도는 어느 정도 되는 거 같아요?


라고 물어보셨다. 나는 그래도 어느 정도 괜찮은 나라에서 태어나서 자랐으니까 중간보다 조금 못한 정도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불행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왜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죠?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나는 불행한데, 세상에 너보다 불행한 사람이 절반이나 되는데 너는 왜 불행하냐고 물어봤다. 물론 나의 상황을 긍정적으로 환기시키기 위한 발언이었겠지만, 나는 나의 불행이 무시당한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나의 불행은 나이기 때문에 불행한 것들이다. 식구들이 족쇄처럼 나를 옭매어오고, 학업은 막막하기만 했고, 나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다른 사람도 나를 싫어해서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런데 내 슬픔보다 더 슬픈 사람이 있으니 이건 슬픈 게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얼마 전에는 내 글에 위로해야 할 사람들이 많은데 내가 자랑을 한다는 댓글이 달렸다. 그 사람은 나의 안위를 내가 광고한다고 했다. 짧은 글 한 편에 담긴 나의 슬픔은 그분에겐 안위로 보였나 보다. 싶어 그냥 웃어넘기고 말았다.


상담가 선생님의 말처럼, 댓글을 남긴 분의 말처럼, 세상엔 나보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 많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전 세계의 행복한 정도의 상위 60~70% 정도니까. 나머지 3,40%의 사람들은 '객관적으로' 나보다 힘들고 불행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지만 가장 해서는 안될 일이 이렇게 남과 비교해 견주어 내가 좀 더 낫다고 안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다 다른 사람들의 불행을 기준 삼아 내가 좀 더 낫다. 네가 좀 더 낫다. 생각하는 것보다 이기적인 기준이 어디에 있을까.


사람은 자신만의 우주에서 생활하는데, 남들보다 조금 낫고 남들보다 조금 못한 게 무슨 소용인가. 내가 불행하다고 내가 우울하다고 생각하면 내가 불행하고 우울한 거다. 내 슬픔의 깊이는 나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되는 거지, 누군가 나보다 못한 사람을 보고 저 사람보단 내가 좀 더 나은 상황이니 저 사람보단 내가 덜 슬프겠지.라고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슬픔의 깊이를, 그 사람의 상황에 견주어 객관적으로 판단하려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중에 돌아보거나 다른 사람들이 얼핏 봤을 때 작은 웅덩이 같은 슬픔일지라도 당사자에게 지금 당장 거대한 해구처럼 느껴진다면, 그는 슬픔의 해구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을 거다. 그 사람에게 필요한 건 해구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뗏목이지 그건 해구가 아니라 웅덩이라 외치는 목소리가 아니다.


우리는 행복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자꾸 누군가의 불행을 기준 삼아 이 정도면 행복하다. 이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하며 내가 느끼는 슬픔과 불안, 우울함을 폄하하고 무시하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위로는 아이러니하게도 슬퍼도 괜찮다고, 꼭 행복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너의 슬픔의 깊이를 나는 받아들이겠다는 위로 일지도 모른다.


얼마 전, 친구 중 한 명이 우울증 치료를 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래서 그냥 많이 힘들었구나. 용기를 내고 병원에 갔구나. 일상생활에 많이 지장이 있었니? 평소에 생활하는 게 많이 힘들어졌니? 하고 물어봤다.


이렇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상대방의 슬픔을 인정하고, 현재 어떤 상황인지 나에게 설명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었다. 그 친구의 슬픔의 깊이를 알 순 없지만, 친구는 힘들어하고 있으니 그 친구의 묘사에 전적으로 순응했다. 내가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였다.


내 치료에서 가장 크게 얻은 건 이 슬픔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내가 슬프다는 걸 인정하고 나니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는 것이 줄어들었다. '저 사람보단 내가 못하다.' '저 사람보다 내가 잘났다.' 하며 내 슬픔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자 하는 생각이 사그라들었다. 그냥 슬프고 힘들 땐 슬프고 힘든 채로 놔뒀다. 슬프고 힘든 걸 고쳐서 행복해져야 한다는 강박도 줄어들었다.


나는 내 우울증의 끝이 행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반짝반짝 빛나고 즐거운 나날이 언젠가 끝없이 지속될 거라는 헛된 희망을 품진 않는다. 내 슬픔의 웅덩이는 깊어졌다, 얕아졌다를 반복할 뿐이지 없어지진 않을 거다. 내 치료의 끝은 단지 이 웅덩이에 물장구를 치는 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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