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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모씨 Feb 24. 2021

'라떼'는 맞았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우울증 공황장애 환자의 직장 일기

직무 특성상, 내 업무 외 프로젝트를 맡아서 진행하게 될 때가 있다. 따로 급여를 더 받는 것도 아니고, 나에게 크게 이득 되는 것은 없지만, 내 개인 역량을 늘려간다는 것에 집중한다는 마음으로 묵묵히 해내고 있다. 업무시간도 모자라기 때문에, 업무 외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야근과 주말출근이 잦아졌다.


나는 직장 때문에 이사를 온 케이스인 데다, 직장 내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어서 이런 생활에 크게 불만은 없었다. 내가 코로나 시국에 이 곳에서 할 수 있는 건 '일' 밖에 없었고, 거기에다 나는 일을 잘하고 싶었다. 그래서 상사가 주는 일들을 곧장 하려고 했다.


나름대로 열정적으로 일을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찰나, 사건이 터졌다. 새로운 실험을 해야 했는데, 중간중간 샘플을 채취해야 했다. 12,24,36,48,72 시간에 맞춰 샘플을 채취해야 하는 것이었다. 즉, 적어도 나흘이 걸리는 과정이었는데, 상사가 이걸 언제 시작하겠느냐 라고 화요일 저녁이 다 되어서야 물어보셨다.


화요일 저녁에 들었으니까, 다음날 준비를 해서 수요일에 일을 시작하면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까지 일을 해야 했다. 토요일에는 약속이 있었고, 나는 병원에 가야 했다.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에는 일 때문에 내가 바빠서 실험을 제대로 하기 힘들겠다고 생각해서 달력을 보고는 '다음 주 화요일에 시작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화요일에 실험을 시작하면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사흘에 걸쳐서 샘플을 채취하고 그다음 주에 검사 결과를 알려드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름의 스케줄을 생각해서 말씀을 드렸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놀라웠다.


나 때는 말이야, 데이터 내라고 하면 바로 일을 시작했어.
요즘은 애들이 상황 봐가면서 일을 하려고 하네.

어안이 벙벙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라떼'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듣던 '라떼'는 항상 나올법한 곳에서, 나올법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말이었다. 그래서 항상 '아이고 저 인간이 또 저러네' 하고 넘기곤 했는데, 이번엔 크게 충격을 먹었다.

그 순간, 업무 외에도 일을 맡아 저녁시간이며 주말이며 쪼개가며 일을 했던 내가 바보가 되는 느낌이었다. 내가 여태껏 했던 노력은 깡그리 무시한 채, 본인이 과거에 했던 일만을 비춰 '나때'에는 이렇게 했다며 지금 내 노력이 그때의 그네가 했던 것보다 못하다며 깎아내리는 것 같았다.


일단, 나는 석사 박사 학생이 아니다. 나는 직원이다. 직원으로서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다 하고, 짬을 내서 하고 싶었던 개인적인 프로젝트를 도맡아 일을  더 하는 것이지, 나는 학위를 수여받기 위해 공부하는 학생이 아니다. 그런데 본인이 학생 때는 데이터를 이렇게 내왔다며 나보고 '열정'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 한다고 생각했던 나였기 때문에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그렇지만 나는 상사의 이런 말들에도 '다음 주에 하겠다.'라고 용기 내서 이야기했다. 나는 일하는 것만큼 치료받는 것도 중요했고, 이렇게 공식적으로 주말에도 나와서 일을 하겠다고 인정해버리면, 나에게 더 한 것을 요구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상사는 원래 '고약한'사람은 아닌지라, 알겠다고 해주셨다.


일을 하면서 나를 괴롭히는 것 중 가장 큰 것은 사람이다. 일이 어떻든 간에 나는 사람을 대하는 게 많이 어려웠다. 전 직장에선 폭언을 일삼았기 때문에, 나는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가 너무 컸다. 앞 뒤 따지지 않고 나에게 '무능하다.' '똑똑한 척한다.' '그렇게 왜 사느냐.'와 같은 말을 했었고, '시발년' '이 새끼 저 새끼'와 같은 욕은 밥먹듯이 들었다.


그런데 내가 용기를 내서 다른 사람의 말에 반박을 했다는 것은 아주 큰 일이었다. 나에게 열정이 없다 말하는 상사에게, 나는 다음 주에 일을 시작하겠다고 말한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그렇게 말을 하고 난 뒤, 내 노동과 노력이 인정받지 못한다는 헛헛함과 내가 상사의 말에 불복종했다는 고양감에 휩싸여 싱숭생숭한 마음을 붙잡고 서둘러 퇴근했다. 추가로 해야 하는 일이 더 있었는데도 말이다.


우울증 치료를 받으면서 나에게 생긴 가장 큰 변화는, 억울한 감정이 많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항상 나 자신을 둘러싼 옹벽을 가지고 있었는데, 조금 다른 방향으로 쌓게 되었다고나 할까? 누군가에게 부정적인 말을 듣거나, 나를 탓하는 말을 들으면 항상 ‘내가 왜 그랬을까?’ ‘저 사람은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나한테 왜 이러는 걸까?’를 생각했다. 이제는 조금 달라졌다. ‘왜?’라는 의문형을 생각에서 제거했다. ‘내가 이미 한 걸 어쩌겠어.’ ‘저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는군, 하지만 나는 달라.’ ‘저 사람은 나에게 이렇게 행동하는군, 하지만 나는 달라.’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항상 누군가가 나에게 하는 일들에 대해서 스트레스받아하며 옹벽을 쌓아왔는데, 이제는 나를 갉아먹지 않는 자기 방어를 할 줄 알게 되었다.


나 때는 맞았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 생각을 가지고 생활하다 보니, 세상 모든 일에 포용력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지금은 ‘틀리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그저 나와 다르다고 생각하니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에 대해서 짜증이 많이 줄었다. 다른 사람이 누가 나에게 뭐라 하든 간에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나는 다르게 행동할 것이다.’라고 생각하게 되어서 그런지, 사람과의 관계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눈에 띄게 줄었다. 물론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는 욕심을 버린 것 도 클 것이다. 여러모로 종합했을 때,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지 않고 나 자신에게 집중하게 된 것이다.


만약 예전 같았으면 상사가 내 노력을 몰라준다는 사실에 좌절하며 속상해서 사흘 밤낮을 울었을지도 모른다. 왜 내 노력을 알지도 못하면서 말을 함부로 하는지에 대해서 며칠 밤을 지새우면서 속상해하고 헛헛한 마음을 달래면서 주말에 억지로 회사에 나와 일을 하고, 병원에 내원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래, 당신이 일을 시작했던 그때는 맞았겠지만, 지금은 다르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주말에 나와 일을 왜 안 하는지 의아해하는 상사에게 ‘실험을 준비하다 보면 시간이 많이 걸릴 거 같으니, 잘 준비해서 다음 주에 시작하겠습니다.’하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금은 속상한 마음을 훌훌 털고 꽃집에서 꽃을 한 움큼 사와 꽃병에 꽂으며 오늘 하루도 수고했다고 나 자신에게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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