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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모씨 Feb 20. 2021

친구들보다 못 버는 초봉 4,500만 원

우울증 공황장애 환자의 직장 일기

‘취준’이라고 가장한 뒤 1년간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정도의 우울증을 치료했다. 글이 읽히지 않았고, 매일 밤 내가 다음날을 살아가야 한다는 절망감에 울면서 잠들었고 다음날 깨어나서 오늘도 살아있어야 했기 때문에 울었다. 약물 치료를 받으면서 어느 정도 나아진 뒤, 취직을 했다. 나도 왜 붙었는지 모를 곳이었다. 그렇게 취직한 곳은 기관 정규직이었고, 현재 2년 차 직장인에 접어들었다.


내가 면접 때 들은 질문은 ‘친구들 보다 못 벌 텐데 괜찮겠냐?’였다. 다들 말하는 ‘사짜’ 직업을 가진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취직 걱정도 없고, 다른 사람들보다 고소득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곳에 들어가기로 결심한 이유는 내가 우울증 환자였기 때문이다. 나를 우울에 나락에 빠트린 근무 환경에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계약직으로 일 년 동안 일하고 재계약을 하는 형태의 근무 형태에선 내가 사회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회사에 취직하고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는 '왜 하필 거기냐'라는 소리였다. 고소득의 길을 내팽개치고 그곳에 취업한 구체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다들 궁금해했다. 나는 그저 웃으며 '그러게 어쩌다 보니 취직을 해서 어쩌다 보니 일을 하는데 생각보다 괜찮아서 계속할 수 있을 거 같다.' 고만 이야기한다.


그렇게 나는 '친구들보다 못 버는' 초봉 4,500만 원에 근로 계약을 했다. 다행스럽게도 좋은 사람들과 괜찮은 근무 환경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서울에서 가까워져 서울에서 진료도 받게 되었다. 우울증은 많이 호전되었고, 글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돈이 생겨도 내 인생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며칠 전 패딩을 입으면서 패딩이 헤진 것을 발견했다. 2015년에 구매했으니 꼬박 7년째 입고 있는 옷이었다. 어떻게 수선을 할 수도 없는 부위라 난감했다. 이 옷도 참 오래 입었구나. 이제 버려야 할까?라고 생각하는 찰나, 이 낡은 패딩이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고액의 겨울 외투를 살 포부가 없었기 때문에 7년 동안 패딩 1개로 버텼다는 사실이 불현듯 상기되었다. 그래서 어차피 가방을 들면 보이지 않을 부위니까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안정적으로 돈을 벌게 되면 내 인생에 많은 전환점이 나타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돈을 벌어도 나는 여전히 가난했고, 앞길은 막막하다. 일단 시드머니를 불려야 할 거 같아서 월급의 70퍼센트 이상을 저축했는데, 모아도 모아도 아파트 전세 자금 조차 마련하려면 몇 년을 쏟아부어야 하는지. 눈앞이 깜깜하기만 했다. 작년 추석을 전후로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면서 역시 나는 죽는 거 외에는 방법이 없겠구나, 라는 생각이 든 적이 있다. 그때도 이런 생각이었다.


내가 돈을 벌든 말든 나는 계속 가난할 거고, 돈을 벌든 말든 내 생활은 바뀌지 않고, 돈을 벌든 말든 내 주변 환경은 변하지 않는구나. 다 필요 없다. 다 소용없다.

나는 돈을 벌면 꼭 해보고 싶었던 것들이 있었다. 백화점에서 옷을 사보고 싶었고, 미용실에도 주기적으로 가보고 싶었다. 그런데 돈을 벌고 나니, 돈을 벌어도 돈을 못 벌 때 못했던 건 계속 못하는 거였다. 내 소비의 폭은 넓어지지 않았고, 나는 돈 쓰는 게 여전히 무서웠다. 그에 반해 내가 돈을 벌기 시작하니 가족들은 득달같이 달려들어 고혈을 빼먹으려고 했다. 내 차를 달라고 했고, 용돈이 적다고 했고, 카드를 달라고 했다.


친구들보다 못 버는 4,500만 원 이기 때문에 내 인생이 크게 바뀌지 않았던 걸까? 친구들처럼 6,000만 원의 연봉을 받았더라면 나는 좀 더 행복할 수 있었을까? 내가 매년 천만 원을 더 벌면 내 인생이 좀 덜 막막했을까? 분명 적은 돈이 아닌데도 나는 왜 만족할 수 없을까?


그래서 나는 '적은 돈'으로도 할 수 있는 취미 생활을 찾아보고, 하나둘씩 즐겨보고 있다. 대형마트 문화센터에서 꽃꽂이를 시작했고, 즐거웠다. 돈을 쓰는 게 마냥 무서운 게 아니라, 돈을 쓰고 나니 이렇게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던 것 같다. 꽃꽂이 수업을 듣고 나면 손에 풀냄새가 베이는데, 그것마저 그렇게 좋았다. 꽃꽂이 수업을 한 날에는 손을 얼굴에 갖다 댄 채로 잠에 들었다.


최근에는 뜨개질을 시작했다. 집중해서 떠야 하기 때문에, 잡생각이 들지 않아 좋았다. 실이 상대적으로 저렴해서 만 원, 이만 원으로 시작할 수 있는 활동이었다. 무늬가 생기고, 모양이 잡혀가는 게 신기해서 좋았다. 꽃꽂이나 뜨개질을 한다고 해서 내 막막한 앞날이 환하게 밝혀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당장 내 곁의 한 줄기 호롱불은 되어주는 것 같다. 나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투자한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실을 꿸 때에는 힘을 일정하게 줘야 편물이 뒤틀리지 않는다. 하지만 혹여나 조금 때가 타고, 삐뚤 해 보이는 완성품도 살살 손세탁을 해주고 나면 자리를 예쁘게 잡곤 한다. 여태껏 내 삶은 한코 두코를 빼먹고, 힘을 너무 많이 줘서 매듭이 작아지기도 하고, 힘을 너무 주지 않아서 헐거운 매듭이 만들어지기도 한 작품일지도 모른다.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치료하는 과정이 뜨개 작품을 손빨래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을 머금어 당장은 몸이 무거울지라도, 뽀송하게 다 마르고 나면 예쁘게 자리를 잡겠지.


친구들보다 못 버는 4,500만 원의 연봉을 일 년 동안 받으며 나는 막막하기만 했다. 일 년이 지나 호봉이 올랐지만, 그래도 친구들 보다 못 버는 연봉을 받고 있다. 그래도 지금의 나는 내가 좋아하고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낄만한 일을 호롱불 삼아 막막한 앞날을 헤쳐나가려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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