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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모씨 Aug 21. 2021

젊은 신입사원의 슬픔

우울증 공황장애 환자의 직장 생활

직장 생활을 한 지도 일 년 하고도 반이 훌쩍 지났다. 어느 정도 생활도 안정되었고, 내가 하는 일들도 어느 정도 손에 익었다. 직장 내 동료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매달 받는 월급으로 적당히 소비하고 저축하며 지내고 있다. 생활이 안정된 만큼 병세도 완만해져 우울증 치료를 위한 병원 내원 주기는 한 달로 늘어났다.


이렇게 평화로운 날이 계속되던 어느 날, 나에게 갈등의 소용돌이가 몰아닥쳤다. 지금 거주하고 있는 기숙사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나는 직장에서 마련해준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다. 1인 1실인 데다 방의 크기도 제법 넓고 구비되어 있는 가구도 잘 유지되어 있어 지내기에 쾌적하다. 퇴거 날짜를 사전에 공지받은 게 없어서 앞서 살았던 다른 사람들처럼 3,4년은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행정직원에게 이번 연말에 입사하는 신입사원 중에 기숙사 거주를 희망하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퇴실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기숙사 공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입사 후배에게도 기회를 주어야 함이 마땅하지만 나의 삶의 터전을 3,4개월 만에 몽땅 옮겨야 한다는 이야기에 회사가 원망스러웠다. 기숙사 거주 희망자가 없으면 계속 살아도 되지만, 희망자가 있을 경우에는 퇴실해줘야 한다는 애매모호한 말 때문에 기분이 냉탕과 온탕을 왔다 갔다 했다. 만약 최악의 경우 보통의 아파트는 입주하는데 석 달, 넉 달의 여유를 두니 지금 당장 집을 알아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내가 가장 먼저  일은  사실을 부모님께 알리는 것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어 신변에 변화가 생길  있을  같다. 말했다. 나에게도 당장 융통할  있는 금액이 한정되어 있어서 걱정이라고 했다. 부모님의 반응은 당연하게도 ‘우리에겐 보태줄 돈이 없으니 담당 행정직원에게 최대한 불쌍하게 말을 잘해봐라였다. 눈곱만큼의 기대도 하진 않았지만 눈앞이 더욱 새카매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며칠 동안 부동산 사이트를 들락날락하며 시세를 살펴봤다. 주변 원룸에는 가기가 싫었고, 근린 숙박 시설의 오피스텔은 대출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 거주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아파트를 알아봤다. 매매와 전세의 가격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아서 매매를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매물을 살펴봤다. 어차피 집은 사야 하고, 나는 그 집에 살아야 하니까 집값이 싼 지 비싼지 물불 가리지 않고 찾아봤다. 그런데 최근의 부동산 정세를 반영해서 10년 된 20평 대 소형 아파트가 일 년 반 사이에 7천만 원이 올라 있었다. 거기에다 부동산 규제지역으로 묶여 있어서 주택 담보 대출은 거래액의 60%만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신용 대출 한도가 내 연봉의 2배 정도 되니까 어떻게든 매매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혹시나 계속해서 기숙사 거주가 가능한 경우에는 구입한 집을 월세로 돌려서 대출 이자를 갚으면 될 것 같았다.



계약을 마음먹고 부동산에 전화를 걸어 집을 둘러보기로 약속을 잡은 그날, 가계부채의 급격한 증가를 막기 위해 신용대출 한도를 줄이겠다는 발표가 났다. 다음날 조회한 나의 대출 한도는 3일 사이에 반토막이 나있었다. 급하게 계산기를 몇 번씩 두들겨 봤지만, 순수하게 내 돈이 5천만 원은 있어야 아파트 매매가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입사한 지 2년이 채 되지 않은 나에게 그만큼의 돈이 있을 리 없었다.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아주 옛날부터 우리 집은 사글세에 살았다. 매달 빠져나가는 월세는 우리에게 너무 큰돈이었고 너무나 아까웠다. 거기에다 언제 쫓겨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리며 지내는  신물이 났다. 그래서 안정적인 인생은 ‘  있고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해도 기숙사에서 쫓겨날 경우  집을 가지려면 최소한 2년은 원룸 방에 있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것도 집값이 더 오르지 않는다는 가정 아래의 이야기였다. 나는 단지 쾌적한 곳에서  물건을 가지고 편안하게 지내고 싶을 뿐인데, 그거 하나가 이렇게 어려웠다. 거리마다 아파트가 즐비해있는데, 내가 살 곳은 없었다.


남들보다 성실히, 열심히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타고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는 없었다. 주변에선 부동산으로 얼마를 벌었다, 주식으로 얼마를 벌었다는 이야기만 계속 들려오고 있는데, 나만 월급 받으며 앉은 채로 빈털터리가 되는 느낌이었다. 내가 넘어야 하는 허들이 얼마나 높은 걸까 숨이 턱턱 막혔다.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힘들어야 하는 건지 눈물이 툭 하고 흘렀다. 나에겐 왜 딛고 올라갈 수 있는 발판이 없는 건지 모든 게 원망스러웠다. 모두가 잘 닦인 경주로를 달리고 있고, 나는 몇 걸음 뒤에서 출발해 진흙밭을 뛰어야 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눈물을 몇 방울 흘리고 나서 창밖을 바라봤다. 저녁에 갑작스레 소나기가 내려 땅이 젖어 있었다. 까치 한 마리가 비를 피하지 못해 쫄딱 젖은 채로 맞은편 건물 옥상에 앉아 몸을 말리고 있었다. 그걸 보고 불현듯 ‘지금 내가 손 쓸 수 있는 일은 없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룸으로 가게 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차근차근 돈을 모아서 더 나은 길로 나아가는 것 밖에 없었다. 나에겐 이 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이 없을뿐더러 비를 쫄딱 맞더라도 비에 젖은 깃털을 잘 말릴 수 있는 시간과 능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를 피할 공간은 나에게 주어지지 않았지만, 나에겐 날개를 펼치고 날아갈 힘이 있었다.


평균적으로 나에겐 살아온 날 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았고, 나는 그 나날 동안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이 충분히 있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했다.

20대에 자택을 소유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내가 큰 욕심을 부렸는지도 모른다. 나 정도면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오만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앞서 출발한 사람들보다 조금 느리고 천천히 달릴 수밖에 없어서 나는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고 있었다.


나는 내 페이스대로 차근차근 살아가는 수행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번 일을 계기로 나는 나 자신을 믿어보는 연습을 하게 됐다. 느릴지는 몰라도 천천히 앞서 나갈 것이라고 나 자신을 믿기로 했다. 아파트로 이사하는 걸 어쩔 수 없이 포기한 게 아니라, 한 발짝 물러났다고 생각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나 자신에게 닥친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먹은 날 저녁, 나는 부동산 사이트에 들어가지 않고 며칠 동안 손에 잡히지 않았던 영어 책을 펼쳐 책을 읽어나갔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시절부터 행복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로 설정되어 있다. 그렇지만, 행복이라는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실상 행복과 가장 가까운 구체적인 감정은 쾌락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여태껏 나의 욕구를 충족시키며 쾌락을 찾는 삶을 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잠깐의 기쁨이 행복이 될 수 없듯이, 나라는 사람과 나의 인생에 대해서 전반적인 만족감을 느끼는 상태를 추구해야 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 자체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연습을 지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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