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모씨 Jun 20. 2021

운동 좀 하세요!

우울증 공황장애 환자의 치료 일지

1년에 한 번씩 받는 직장인 건강 검진을 받아야 할 때가 왔다. 우리 회사는 건강 검진을 무조건 9월 내로 받아야 한다. 여름에 발목 인대 파열로 인한 수술과 경골에 미세 골절이 있어 깁스를 한 채로 치료를 하기로 했다. 깁스를 6주 동안이나 해야 했다. 깁스를 한 채로는 건강검진을 받을 수 없다고 해서 수술 전에 검진을 예약하고 병원에 다녀왔다.


건강검진은 항상 무섭다. 몸에 가해지는 이상신호는  눈에 잘 띄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에게 병이 생겼다면, 내 생활은 어떻게 될지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따른다. 그리고 나는 살찌는 게 너무 무섭다. 나는 마른 게 좋은데, 이제 나는 누가 보기에도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미디어에서 쉽게 접하는 그런 사람들 같은 몸을 가지고 싶었다. 그래서 체성분 측정을 하는 게 무서웠다. 살찐 나를 수치상으로 마주하게 된다면 내가 더 싫어질 거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살은 쪘다. 그래도 건강검진 전에 살을 좀 빼야 된다고 난리를 쳤던 덕에 아주 많이 찌지는 않았다. 그래도 우울했다. 나는 38kg일 때가 좋았다. 그렇게 많이 먹는 편도 아닌데 살이 되려 쪘다니 내가 싫었다. 나 자신이 너무 한심하다고 생각하며 검사가 끝났다. 마지막 순서는 의사 선생님과의 면담이었다.


혹시나 수면 내시경 결과에서 잘못된 것이 있을까 봐 걱정했다. 다행히도 그런 건 없었다. 그래도 아직 젊어서 그런지, 건강상에 큰 이상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의사 선생님과의 상담이 이어졌다. 약물 복용하는 게 있는지 여쭤보셨고 나는 우울증 약물을 복용하고 있다고 했다.

우울증이요? 운동 좀 하세요.

나는 최근에 발목을 다쳐서 최근에는 운동을 잘 못했다고 했다.

그건 핑계잖아요. 왜 핑계 대세요? 다친 지 얼마나 되셨는데요?

다음 주에 수술을 한다고 했다.

그러면 한 발로 플랭크라도 하세요. 운동 안 하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그 자리에서 기분이 나빴고, 울고 싶었다. 나의 아픔이 단순한 ‘운동 부족’으로 인한 거였고, 나는 나의 아픔에 핑계를 대는 사람이었다. 만난 지 15초밖에 안된 사람에게 정의되는 것은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나의 우울증은 사람과의 관계가 어긋나면서 찾아온 것이다. 물론 물리적인 환경들도 나를 괴롭혔지만, 그보다 더 나를 아프게 했던 건 그 환경에서 다른 사람들이 내게 가했던 본의 아닌 폭력 때문이었다. 제대로 된 관계의 부재는 나를 어엿한 한 사람으로 성장하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나는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으로 치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외로운 동물이고, 사회적인 동물이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만 한다. 내가 독립적이고 건강한 사람이 되기 위해선 나를 독립적으로 존중해주고 건강하게 지낼 수 있게 옆에서 도와주고 응원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나는 매일 1.5킬로를 7분에 뛴다. 여자 특전사들이 1.5킬로미터를 6분 44초에 뛴다. 그 의사는 내가 평소에 무엇을 하는지, 내가 왜 아픈지, 내가 얼마나 아팠는지 아무것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의료진에게 '운동을 하지 않아 우울증에 걸렸다.' 고 정의 내려졌다. 괜찮게 잘 지내고 있었는데, 이렇게 불현듯 사람에게 상처를 받았다.


병원에서 나오면서 눈물이 툭 하고 흘렀다. 가뜩이나 살찐 내 모습이 혐오스러웠는데, 나 자신이 싫은데, 같잖은 충고를 들었다. 나는 누구에게도 심지어 의사에게도 저런 말을 들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내뱉은 말에 내가 깊은 상처를 입을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가시 돋친 말을 툭툭 털어냈다.


 글을 쓰다 보면 댓글로도 '햇빛을 많이 쬐세요.' '커피를 줄이세요.' '땀이 나게 운동을 하세요'와 같은 애정 어린 충고들이 많이 보인다. 내가 걱정되어하시는 말씀일 것이다.


내가 처음 우울증 치료를 받을 때 병원에 내원할 당시, 나는 수면 상태가 엉망이었다. 4시간을 자고, 4시간을 깨어있다가 또 4시간을 자고 또 4시간을 깨어있는 식이었다. 그런데 병원에는 맛있는 커피 머신이 있었다. 커피를 한 잔 내려 마시고, 원장님께 여쭤봤다.


'제가 커피를 마셔도 괜찮을까요?'

커피 좋아하세요?

'네'

세상에 나쁜 것들만 지금 생각날 텐데, 본인이 좋아하는 건 즐기시는 게 낫습니다.

쉽게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정보의 바다를 헤엄쳐 살고 있다. 우울증에 대해서 검색해보면 다양한 치료 방법이 나온다. 가공식품을 줄이고, 술을 줄이고, 커피도 줄이고,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하고, 운동을 해야 하고, 햇빛을 많이 봐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우울해할 때 쉽사리 생각이 나는 충고도 있다. 기분 전환 겸 맛있는 걸 먹고, 혼자서 여행을 다녀오고, 우울한 생각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하면 된다.


하지만 우울증인 사람들은, 정상적인 생활과 생각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우선적으로 일상생활을 제대로 해낼 기력이 없는 경우가 많다. 다른 사람도 싫고, 그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싫은 사람에게 필요한 건 어떻게든 힘을 내서 무언가 하라는 충고보단 네 곁애 내가 있어주겠다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우울증인 사람 곁에 있는다는 것은 정말 소모적인 일이다. 말을 해도 듣는 것 같지 않고, 나아지지도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면, 우울이라는 바퀴가 한 바퀴 돌아 괜찮은 날이 찾아오는 걸 기다려 주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울증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고, 언제나 찾아올 수 있기 때문에 언젠가 내 이야기가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건강 검진 다음날 정신과에 방문했다. 선생님에게 물어봤다.

'제가 운동을 해야 할까요?'

평소에 운동은 하시잖아요.

'네 운동하죠. 발목 다치기 전에는 조깅도 하고, 하루에 만보 이상 걸어 다녔어요.'

운동을 더 하고 싶으세요?

'체력 때문에 신경은 쓰고 있어요.'

하고 싶은 걸 하는 데 더 신경 쓰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원장님은 수술을 하면 꽃꽂이 수업을 못 듣는다는 나를 걱정해주시며 상담이 끝났다. 입원 생활을 잘하시고, 푹 쉬라 고도하셨다.


최근에 연락을 주기적으로 주고받던 친구가 우울증 약을 먹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내가 물어본 건 '집안일은 어때? 일은 손에 좀 잡혀? 식욕은 좀 어때?'였다. 집안일은 하지 않으면 벌레가 생겨 겨우 하고 있고, 일은 쉬는 날이 많아졌는데 다행히 병가를 낼 수 있어서 상사도 이해를 해준다고 했고, 식욕은 있지만 음식을 먹기까지가 힘들어서 컵라면만 먹는다고 했다.


자기 자신을 꾸미는 걸 좋아하는 친구였다. 화장대에 화장품이 가득 찬 걸 좋아했고, 예쁜 옷을 입는 걸 좋아했다. 그렇게 부지런히 뭔갈 했던 친구가 설거지하는 거 조차 힘들어하고 있구나, 싶었다. 내가 거기에 대고 충고나 조언을 할 순 없었다. 나에겐 감히 다른 사람의 슬픔과 우울을 판단할 권리가 없다.


그래서 그래도 직장에서 이해해줘서 다행이다, 밥 먹는 건 걱정되니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하면 내가 보내주겠다. 사람마다 쳇바퀴 돌듯이 그런 시기가 있는 거 같다. 풍차 돌듯이 그 시기가 지나가고, 점점 그 풍차의 크기가 작아져서 감정의 기복이 줄어들어 평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치료받는 게 아닐까, 하고 이야기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과 베풀 수 있는 예의는 그게 전부였다.


건강 검진을 받고 버스를 타고 가면서, 내가 혹여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았는지, 누군가 상처 주지 않았는지 되돌아봤다. 귓전에는 '왜 핑계를 대느냐'는 가시 돋친 말이 계속 맴돌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오늘도 달린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