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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모씨 Sep 25. 2021

먼 가족보다 가까운 세븐틴

우울증 공황장애 환자의 치료일지

예쁜 말

모두 모아서 따다 주고 싶은데

너 앞에 서면 자꾸 들어가는 말

새벽에 물을 마시면서

혼자 다짐해 나는 너에게

턱 끝까지 차올랐던 그 말을

내일 꼭 하겠어

너 예쁘다


세븐틴-예쁘다


내 인생에서 '어른스러운 문제'에 대해 의논할 만한 사람은 얼마 없다. 직장 동료들도 '내 일'처럼 생각해주진 않기 때문에 어느 정도 걸러 들어야 하고, 내 사정을 다 말할만한 주변 친구들도 없다. 남자 친구도 사회초년생이긴 마찬가지다. 내 주변에서 '통찰력' 있는 '현명한' 어른의 충고를 듣기는 어렵다. 그래서 나는 부모님을 찾았다.


이번에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 청약이 나오는데, 무리를 해서라도 큰 평수에다 넣을지 아니면 임대아파트가 끼여있는 작은 평수에 넣을지 고민이 되었기 때문이다. 내 나이에 주택 청약을 넣는 것이 잘하는 일일까에 대해서도 걱정이었다. 그렇지만 평생 내 집 마련을 하려면 청약 밖에 없을 것 같고, 좋은 위치에 괜찮은 아파트가 등장해서 청약을 넣고 싶은데 나는 돈이 없으니까 작은 평수에 넣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청약에 당첨되고 내 집이 생기는 게 좋을 것 같았지만 임대 아파트 때문에 나중에 집값이 아주 많이 오를 것 같진 않았다. 이게 맞는 일인지, 걱정이 됐다.


단지 조성도를 본 아빠는 '이번 청약은 하지 말라'라고 했다. 내가 넣으려고 했던 집이 임대아파트가 끼어 있어 집값이 많이 오를 것 같지 않다고 하셨다. 그러고는 내 직장 근처에 집을 구하지 말고 지금 엄마 아빠가 살고 있는 임대아파트의 분양권을 사라고 했다. 보증금이 5천만 원 있으니까, 3억을 구해다가 넣으면 된다고 했다.


사회 초년생인 나한테 3억은 무슨, 3천만 원도 간당간당하다고 나는 못 사겠다고 했다. 아빠는 '시간은 있으니까 돈을 어떻게 잘 굴려봐라'라고 했다. 언니도 합세했다. '여기 집을 사면 좋겠다.' 했다.


엄마 아빠가 살고 있는 곳의 브랜드 아파트의 가격대는 평당 2,000만 원이 넘는다. 분양권을 산다면 가격이 오를 것은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엄마 아빠가 살고 있는 아파트가 국민 임대가 끼여 있어서 가격이 아주 많이 오르진 않겠지만, 그래도올라갈 것은 분명하고  분양권이 아까우니 네가 사라고 했다. 


지금으로부터 3년 전, 내가 극도의 우울증 때문에 일을 그만두고 한창 사무관을 하겠다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사무관 준비를 하다가 나는 서술형 답안을 첨삭받을 돈이 없으며 우리 부모님은 보태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사무관의 꿈을 접었다. 그렇게 일 년을 쉬었다. 쉬었다기 보단, 일 년이 없어졌다. 하루 종일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우울고 무기력이라는 병마와 싸우며 나는 취직을 준비했다. 


집에서는 내가 취직 준비를 하는 줄 알고 있었고, 그때 엄마 아빠가 지금 살고 있는 임대아파트에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러곤 아빠는 나에게 전화해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 임대 아파트 분양권 사게 네가 1억은 줘야 하지 않겠냐.' '노년에 집 걱정 없게 살아야겠지 않겠느냐. 너네 엄마가 고생을 참 많이 했다.' '빨리 돈을 벌어라.'

여태껏 없이 살아왔으면서 어떻게 돈을 '달라'라고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지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더 군다가 연초에 사무관 시험 준비도 보태주지 못한 사람들이, 내 대학 등록금도 한 번 제대로 대주지 않았던 사람들이, 노년 걱정을 하면서 빨리 돈을 벌어 오라고 했다. 살면서 그렇게 화내 본 적이 없었다.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하라고, 당신들끼리 살아라고 말했다.


내가 나쁜 사람이었다. 언니도 엄마도 '좋은 게 좋은 거지 우리가 잘 사는 게 나쁜 건 아니다.'라고 했다. 내가 집사는 데 돈을 '줘야' 한다고 했다. '우리가 잘 사는 게 그렇게 싫냐.'라고 했다.


그 일이 있고 난지 3년이 채 되지 않아 나에게 이번엔 '1억' 이 아니라 '분양권'을 사라고 했다. 엄마와 언니도 내가 분양권을 사기를 원했다. 작은 딸이 지금 살고 있는 집의 분양권을 사고, 온 식구들이 새로 지은, 깨끗하고 넓은,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며 벌레 걱정 없는 집에서 계속 지내길 원하고 있었다.


일단 부모님에게 거절을 하고 밤잠을 설치며 열심히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애초에 나한텐 3억이 없다. 그렇지만 내가 만약 이 집을 사게 된다면, 엄마 아빠 전재산이 분명한 오천만 원을 보태서 이 집을 사게 된다면, 내가 부동산으로 얼마를 더 벌든 간에 엄마 아빠한테 얽매일 것이 분명했다. 내 발에 족쇄를 매다는 격이었다. 나는 내가 살 집도 없다. 나도 지금 허름한 원룸에서 살게 될 판에, 200km 넘게 떨어져 있는 엄마 아빠는 본인들 주거를 해결해달라고 했다.  


식구들이 잘 살면 나도 좋겠다. 다들 배곯을 일 걱정 없이 언제 쫓겨날지 걱정하지 않으며 살았으면 좋겠다. 지금 집은 우리 식구들이 한 평생 살아보지 못한 깨끗하고 널찍한 새집이었다. 이런 곳에서 평생 큰 걱정 없이 살았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이 일에 내 인생을 갈아 넣고 싶진 않았다. 이기적 일지 모르겠지만 나부터 살고 싶었다.


그 말을 들은 다음날 아침 일찍, 나는 도망치듯이 나왔다. 나를 역으로 바래다주면서 식구들은 나더러 집에 좀 자주 오라고 했다. 기숙사 문턱을 넘자마자 드디어 내 집에 왔다는 안도감과 함께 눈물이 터졌다. 내가 나쁜 걸까, 내가 이기적인 건가 죄책감도 들었고 본인들 문제를 나에게 해결해달라는 가족들도 원망스러웠다. 나도 내 삶을 살고 싶은데, 가족들의 말은 나의 생애 주기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발언이었다.


삶이 무겁고 혼란스러웠다. 내가 몇 년을 일해야 모을 수 있는 돈일까 버거웠고, 어른인 엄마 아빠의 말이 최선책인 것일까 혼란스러웠다.


오랜만에 공황발작이 왔다. 곧 죽어버릴 것 같은 느낌에 휩싸였다. 집에 구비되어 있는 수면 유도제를 다 뜯어먹어버릴까, 흐르는 눈물과 함께 그냥 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일었다. 


다행스럽게도 연휴가 끝난 다음날 병원 예약이 있었고, 원장님은 명절은 어떻게 잘 '민족 최대의 스트레스를 견디셨느냐'라고 물어보셨다. 힘들었다고, 혼란스러웠다고 했다.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원장님이 말씀하셨다. 다른 사람의 돈은 참 가볍고 쉬워 보인다고, 정말 잘 거절하셨다고, 본인의 인생이 우선이라고 하셨다. 내가 나쁘고 틀린 것이 아니구나 싶어 안도감이 들었다. 다음번에 이런 결정을 할 땐 가족들과 상의하지 마시라고, 알아서 하셔도 충분하실 것 같다고 하셨다.


제 인생에 '큰 일'을 상의할 어른이 없다는 것이 착잡해요.
씁쓸한 이야기지만, 인생에 진정한'내편'은 '나'밖에 없을지도 몰라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시지 마시고 자기 자신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이윽고 나에게 원장님은 '좋아하는 아이돌이 누구예요?'라고 물어보셨다. 나는 세븐틴을 좋아한다.  멤버들 이름이나 얼굴은 잘 몰라도, 세상에 어떤 일이 있어도 널 좋아한다. 네가 좋다. 힘들 땐 걸어도 된다는 노래를 많이 불러줘서 나는 세븐틴 노래를 좋아한다. 한창 힘들었을 때도 세븐틴 노래에 위로를 많이 받았다. 그래서 나는 그 질문을 듣자마자 '세븐틴이요.'라고 대답했다.


멀리 있는 가족보다, 가까운 세븐틴이 낫습니다.
직캠 영상도 보시고, 굿즈도 사보세요.

그 말을 듣고 약을 타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세븐틴의 홈런을 들었다. '평소처럼만 하면 돼. 뭐가 그리 걱정돼.'라는 가사가 들렸다. 내 인생은 내가 살아가는 것이다. 주변 환경이 나를 흔들어도 휩쓸리지 않을 기준은 나 자신이 되어야 했다. 나를 흔드는 것이 설령 피를 나눈 가족이라고 할지라도.


노래를 들으며 내 삶의 시작은 내가 원하지 않았지만 내 삶을 잘 마무리하는 건 내 의지대로 하고 싶다고, 걱정 없이, 기쁜 일이 가득한 삶을 살고 싶다고, 내일이 기대되는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멀리 있는 가족보다 가까이 있는 세븐틴의 4분짜리 노래가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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