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술 자료 펼치기(옛 신문을 중심으로..)-23
‘마산(馬山)’은 2010년 창원과 진해와 통합되어 창원시가 되었다. 과거 일제강점기 신문에서 술과 관련된 자료를 찾으면 많이 나오는 도시 중에 하나가 마산이다. 일본인들의 자료에 따르면 마산은 ‘꽃의 도시'이자 '술의 도시'였다. 일본인이 쓴 책이나 관광 안내 팸플릿을 보면 무학산과 합포만, 벚꽃과 술이 환상적으로 그려져 있다(1).
마산 최초의 청주 양조장은 개항 5년 후인 1904년 일본 거류민 아즈마(東忠勇)에 의해 설립된 아즈마(東) 주조장이다. 1905년에는 원마산 서성동에 이사바시(石橋) 주조장이 설립되었다. 이밖에 1906년 장군동에 설립된 고단다(五反田) 주조장, 같은 해에 청계동에 설립된 엔무(永武) 주조장, 1907년 홍문동에 설립된 니시다(西田) 주조장, 1908년 상남동의 오카다(岡田) 주조장, 1909년 장군동의 지시마엔(千島園) 주조장 등이 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 마산의 대표 산업에서 조선의 대표 생산 지역으로 성장하여 ‘주도(酒都) 마산’으로 불리게 된다.
1920년 마산의 청주 생산량은 13개 양조장에서 4,400석이 생산되었으며 부산의 6,300석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1923년에는 12개 양조장에서 1만 1000석을 생산하여 부산의 생산량 1만 석을 추월, 조선 최고가 되었고 1938년에는 2만 석을 생산하였다. 1929년에 대형 종합 주류 생산 업체인 소화(昭和) 주류가 설립되었다. 당시 마산의 주조장은 일제 강점기하에 내수용에서 시작하여 만주와 중국 대륙에 수출용까지 생산하게 되어서, 1938년 2만 석을 넘겼다고 한다(3, 4).
그럼 마산은 왜 ‘술의 도시’가 되었을까? 여기에는 슬픈 역사적 배경이 있다.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공업이 더욱 발달하고 도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심각한 식량 문제에 부딪혔다(5). 일제는 1910년부터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수많은 농민들의 농지를 침탈함으로써 조선의 토지에 대한 강제적 권리를 확보한 후 자국의 식량공급, 군량미 충당 등을 목표로 3차례의 산미증식계획(1차 1918~1926년, 2차 1926~1933년, 3차 1940년 이후)을 추진하였다. 산미증식계획은 일제의 미곡 수탈정책으로서, 토지개량사업(관개개선·지목변경·개간·간척)과 농사개량사업(우량품종보급·시비증대·경종법개선)에 의한 미곡 증산을 통하여 일본의 식량문제를 한반도를 통해서 해결하려는 의도로 입안된 것이었다(6).
사실 마산뿐만 아니라 일본 수출을 위해 개항을 한 지역에서는 쌀 수탈이 많이 이뤄졌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부산, 원산, 인천, 목포, 진남포, 마산에 이어 군산이 1899년 5월 1일에 강제로 개항되었다.
군산 역시 쌀 수탈의 전초기지였다. 최대 곡창지대였던 호남평야와 논산평야의 쌀이 지금은 벚꽃 길로 유명한 ‘전군가도(전주~군산)’를 통해 국산항에 쌓였다가 일본으로 수송됐다. 일제는 1908년 10월 국내 최초로 전주-군산 간 도로를 포장했으며 익산-군산 간의 철도를 개설, 군산은 호남 최대의 상업도시로 성장했다. 1909년 조선의 전체 쌀 추출량의 32.4%가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빠져나갔다(7).
군산을 이처럼 급격히 항구도시로 성장시킨 배경은 호남, 충청의 농토를 빼앗고 가난한 일본 농민을 옮겨와 살게 하고, 역시 호남, 충청의 쌀을 일본으로 강제 수출시켜 일본의 쌀 부족을 보충하고자 함이었다. 따라서 전북 지역은 가장 많은 일본인 농장이 모여 있던 지역이 되었고 가장 높은 사회 지배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던 일본 식민정책의 중심이 되었다. 군산지방은 쌀 수출항구로서의 위치 때문에 특히 농장이 많이 모여 있었다. 1910년 한일합병에 이르기까지 전북 지역에는 이미 24개의 일본인 농장이 만들어졌다. 이후 1920년에 이르기까지 다시 18개의 농장이 더 만들어졌다(8).
군산에 진출한 일본인 농장주와 미곡상들은 "조선 쌀은 쌀 맛도 좋고, 술을 빚어도 좋다"는 상품 전단지를 대대적으로 일본 본토에 뿌렸다. 군산 발산초등학교 부지의 "시마타니야소야" 농장주도 일본에서 술장사를 했던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군산으로 진출한 많은 일본인들은 큰 농장도 소유하였지만, 술을 빚는 주조장도 운영하여 군산의 양조산업이 시작되었다. 이들 주조장 중 향원 주조장에서 빚는 술 오처(吾妻, 내 마누라)는 전일본주조장협회 청주 콘테스트에서 1등을 할 정도로 품질이 좋았다. 조선(군산) 쌀로 만든 청주가 일본 청주(사케) 대회를 나가 1등을 한 것이다(9).
결국 일본으로의 쌀 수탈을 위해 항구도시들을 발달시켰고 그중 몇몇 지역은 집중적으로 쌀을 수출하는 곳들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각 지역의 쌀들 또는 일본인들이 만든 농장에서 많은 쌀이 생산되면서 자연스럽게 양조업까지 연결이 된 것이다. 이러한 술들은 대부분 조선인이 많이 먹는 탁약주가 아닌 고급 청주(사케)를 만드는 데 사용이 되었다.
해방 이후에도 이러한 적산들을 이어받은 양조장들이 지속적으로 생산을 했다. 마산은 청주 양조장 13개가 귀속·불하되어 1946년 세무 당국으로부터 주류 제조 면허를 받아 생산에 들어갔다. 삼성(三星)·염록(艶綠)·금포(金浦)·대흥(大興)·칠성(七星) 등이다. 조선 중앙 소주는 마산 중앙 소주, 소화(昭和) 주류는 동양 주류 주식회사, 야마무라(山邑) 주조는 무학 주조로 바뀌어 1951년 이후 불하받은 한국인이 운영하였다. 일본인이 독점했던 청주 회사와 달리 탁주 업계는 주로 조선인이 경영했고 규모도 영세했다. 적산이었던 청주 양조장과 달리 탁주 양조장은 해방 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군산의 청주 역시 조선양조가 백화양조로 개명하고, 1970년대에 백화수복을 만들었으면 1985년 두산주류로 매각된 후 2009년 롯데 주류가 인수를 하게 되었다.
결국 일제는 쌀 수탈을 위해 우리나라 쌀 품질 향상과 생산량 증대를 원했고 그것을 실행했다. 특히, 수출을 위한 항구 도시를 거점으로 풍족한 쌀 자원으로 양조산업에 진출을 했고 지역 양조산업의 발달로 이루어졌다. 일제강점기 지역의 발달한 술 역사 중 일부는 우리 쌀 수탈과 우리 양조 역사의 아픈 기억일지 모르겠다.
(1) 역사와 삶의 풍경들 참조 https://blog.naver.com/yufei21/60065397049
(2) 허정도와 함께 하는 도시 이야기 https://www.u-story.kr/130
(3) 디지털창원문화대전
http://changwon.grandculture.net/Contents?local=changwon&dataType=01&contents_id=GC02202927
(4) 물좋은 마산의 술(소주,청주,탁주,맥주), 그리고 간장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637175&cid=51943&categoryId=54860
(5) 국사편찬위워회 우리 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front/ta/view.do?levelId=ta_m71_0100_0010_0020_0030
(6) 국가기록원 http://theme.archives.go.kr/next/foodProduct/policy1950p1.do
(7) 쌀밥전쟁. 김환표 지음
(8) 한국콘텐츠진흥원
(9) 군산시 문화관광해설사 조시탁 https://story.kakao.com/_57fr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