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주 주(酒)저리 주(酒)저리-163
현재 전통주 제조법의 대부분을 보면 쌀을 주원료로 하고 있으며 쌀을 증기로 찐 고두밥으로 제조하는 형태이다. 이러한 제조법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오래전 고문헌(최초 기록은 1450년경 산가요록)에서부터 쌀과 고두밥에 대한 술 제조법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고문헌 술 제조 원료에 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찹쌀, 보리, 밀, 조 등 다양한 원료를 이용한 술 제조법이 있고 이러한 원료의 전처리도 고두밥 외에 죽, 범벅, 구멍떡 등 다양한 제조 방법을 통해 술의 맛과 향을 다양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술을 만드는 주원료인 쌀을 주변에서 쉽게 구한 것은 우리 역사 전체로 볼 때 최근의 일이다. 우리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보릿고개’라는 말이 있었다. 지난가을에 수확한 양식은 바닥이 나고 보리는 미처 여물지 않은 5~6월(음력 4~5월), 농가 생활에 식량 사정이 매우 어려운 고비를 가리키는 말이다. 통일벼가 나오고 비료나 농약을 통해 식량이 넉넉해지기 전까지 이 보릿고개를 넘어서 쌀밥을 충분히 공급하는 게 국가 정책의 중요한 목표인 적도 있었다. 이처럼 쌀밥을 배불리 먹는다는 것이 어렵던 시절을 우리는 얼마 전까지 겪었다.
그렇다면 ‘식(食)’의 기본인 쌀이 풍부해지기 전에 최초의 술은 어떠한 형태에서 시작이 되었을까? 세계적으로 가장 오래된 술 유적은 중국의 기원전 7,000~6,500년(신석기시대) 점토 항아리에서 쌀, 포도, 꿀, 산사나무 열매로 만들어진 술의 잔류물이 발견되었다. ‘밥의 인문학(정혜경 지음)’을 보면 우리나라의 벼농사 시작이나 주식으로 곡물을 먹는 농경의 시작을 신석기시대부터로 보고 있다. 일부에서는 1998년 충북 청원군 소로리 구석기 유적지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가 발견되므로 써 우리나라의 쌀농사 기원을 신석기 이전으로 추정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이처럼 벼의 존재가 신석기부터 있었다고 하지만 한반도에서 신석기시대에 가장 많이 재배 한 농작물은 벼가 아닌 좁쌀, 피, 수수 등의 밭작물이다. 신석기시대 유적인 황해도 봉산 지탑리 유적에서는 좁쌀과 피가 발견되었고, 평양 남경 유적에서도 좁쌀이 발견되었다. 청동기시대 유적 가운데 무산 호곡, 회령 오동 유적에서도 기장, 수수, 콩, 팥 등이 발견되었다. 당시 사람들이 지금과 같은 밥을 지어먹는 것 역시 쉽지 않았다. 도정 기술이 없었기에 벼를 대충 갈아서 토기에 끓인 죽 형태 또는 쪄서 먹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기에 죽이 밥보다 먼저 시작된 형태로 보기도 한다.
여러 자료들을 살펴보면 우리나라에서 신석기시대를 포함해서 삼국시대의 주식은 쌀이라기보다는 좁쌀, 보리 등 밭작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에 이르면 귀족과 왕족의 계급 사회가 되면서 왕족이나 귀족은 쌀을 주식으로 즐길 수 있었지만 쌀 생산은 제한되었기에 일반 백성은 쌀을 충분히 먹기 어려웠다. 평민의 주식은 잡곡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삼국사기’를 보아도 평민들은 여러 가지 잡곡 중에서 조나 보리를 먹고살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나마도 충분하지 않았다고 이야기들을 한다. 삼국시대에서는 과거처럼 죽을 만들거나 쪄서 먹기보다는 솥에다 쌀을 끓여 익히는 조리법이 통용되기 시작했다. 통일신라시대에도 귀족들이 쌀밥을 먹었다면 평민들은 조나 보리를 먹었다.
쌀이 귀하던 시대에 사람들은 어떤 재료로 술을 만들었을까? 우리나라 문헌에서 술 이야기가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이규보(李奎報)가 쓴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동명왕(東明王) 편이다. 이 당시 곡물 술이라는 존재가 사람들 사이에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삼국시대 이전인 마한(馬韓) 시대부터 수확 후 맑은 곡주를 빚어 조상께 먼저 바치고 춤과 노래와 술 마시기를 즐겼다고 한다. 곡물로 술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그 곡물이 쌀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오히려 당시 곡물의 재배 형태로 유추해 보면 잡곡이 술 원료였을 확률도 있다. 술 제조법 역시 당대에 이용한 쌀처럼 끓여 익히는 조리법과 함께 조금 더 단단한 곡물이었던 수수나 조를 분쇄해서 죽을 만들거나 찌는 형태의 술 제조법이 시도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쌀 술을 전혀 만들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쌀의 귀한 정도로 봐서는 쌀을 이용한 술은 왕과 귀족이 마시던 술로 한정되었을 것이다.
고려시대에도 이러한 쌀에 의한 계급의 차이는 심했다. 쌀밥은 여전히 귀족의 몫이었다. 상류층이라 할 수 있는 관리들에게 봉급으로 제공된 것이 쌀인 것으로 보아 쌀이 얼마나 귀중했는지 알 수 있다. 백성들은 여전히 기장을 비롯한 잡곡밥을 주로 먹었다. 고려시대 쌀을 이용해서 술을 만든 기록을 보면 고려시대(1123년)에 송나라 사신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파견되어 온 서긍(徐兢)이 작성한 <고려도경>에 “고려에서는 찹쌀(나미, 稬米)이 없어서 멥쌀(갱, 秔)에 누룩을 섞어서 술을 만드는데, 빛깔이 짙고 맛이 진해 쉽게 취하고 빨리 깬다”라고 하였다. 고려에서는 멥쌀만 재배했고 그것을 이용해 술을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여러 기록을 살펴보면 고려에도 찹쌀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기에 아마도 멥쌀과 찹쌀을 사용한 술들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쌀은 역사적으로 일반 백성의 주식이 아니었다. 쌀은 국왕, 왕족, 관료 양반 등 지배층의 주식이었고 피지배층에게는 조세 납부의 대상일 뿐이었다. 대부분의 백성까지 쌀밥을 먹을 수 있었던 시기는 문헌에서 조선 중기로 보고 있다. 술로써는 삼국시대부터 쌀 술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 쌀 술이 어떤 술 만들기에 사용되었는지는 얼마나 사용되었는지 현재의 자료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당시 잡곡 술과 함께 쌀 술이 공존했으리라는 것만 유추만 할 뿐이다.
최근 우리 술을 만드는 재료에 있어 쌀을 가장 쉽게 볼 수 있다. 쌀의 풍부해졌기에 쌀로 만든 막걸리를 비롯한 약주, 청주, 소주 등 대부분의 술 재료에서 쌀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큰다. 쌀로 만든 술을 우리가 오랫동안 마셔왔기에 익숙한 것도 맞지만 언제부터인가 술의 원료가 단순화되고 있다. 재료가 단순화되다 보니 술의 맛들도 비슷해지고 독창성이 사라져 가고 있다. 우리 조상이 풍족하지 못했기에 오랜 역사 속에서 마셔왔던 조, 수수, 보리 등의 잡곡이 들어간 다양한 전통주 역시 우리의 오랜 역사성을 가진 술일 것이다. 쌀 이외의 다양한 잡곡 원료의 사용은 소비자 선택의 폭을 넓힐 것이며 우리에게 더 다채로운 술을 즐길 수 있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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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술 칼럼에 게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