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로 살펴본 고려시대 술의 사회적 의미

전통주 주(酒)저리 주(酒)저리-234

<본 글은 '한국술 고문헌 DB(한국술문헌연구소 제작)'의 내용을 참고하여 작성하였습니다.

도움을 주신 @jaehyung.kim.520 김재형님께 감사드립니다. http://koreansool.kr/ktw/php/home.php >


앞선 『고려사』 분석에서는 고려시대 술의 정치적, 경제적 의미를 살펴보았다. 이번 글에서는 『고려사』에 나타난 기록을 중심으로 고려시대 술이 지녔던 사회적 의미를 고찰하고자 한다. 술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단순한 기호품을 넘어 사회의 구조와 가치관을 반영하는 문화적 지표로 기능해 왔으며, 고려시대 역시 이러한 특성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고려사』를 비롯한 여러 사료에는 술과 관련된 다양한 기록이 등장하는데, 이는 단순한 음주 행위의 기록이라기보다 당시 사회 질서와 가치 인식의 단면을 드러내는 자료로 해석할 여지가 크다(1).


고려 전기에는 탁주와 약주가 주된 술의 형태였으나, 원나라의 침입 이후 증류 기술이 유입되면서 고려 후기에는 소주가 확산되었다. 이로써 고려시대에는 탁주, 약주, 소주라는 서로 다른 제조 방식의 술이 공존하는 구조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주종의 확대에 그치지 않고, 술 제조 기술과 소비 방식의 다양화를 의미한다. 더불어 농업 기술의 발달과 경작지 확대는 곡물 확보를 용이하게 하였고, 이는 술의 생산량과 품질 향상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조건의 변화는 술의 공급과 소비가 일상화되는 기반이 되었으며, 그에 따라 술이 차지하는 사회적 위상 역시 점진적으로 변화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고려사』에는 이른바 ‘사원 주조(寺院酒造)’에 대한 기록이 네 차례 등장한다(2). 불교 계율상 술은 명백한 금기 대상이지만, 고려 사회에서 사찰은 단순한 수행 공간을 넘어 대규모 토지와 인력을 보유한 경제 주체이자 지역 사회의 중심적 공간이었다. 이러한 사찰이 곡물을 가공해 술을 빚는 행위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1차 생산물을 활용한 2차 가공 활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사료에 나타난 사원 주조의 사례들은 상황과 맥락에 따라 서로 다른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첫 번째 기록은 다음과 같다.

------------

1021년 06월 미상 (음)

〈현종(顯宗)〉 12년(1021) 6월 사헌대(司憲臺)에서 아뢰기를,

“여러 절들의 승려들이 술을 마시고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금지하십시오.”

--------------


이로부터 6년 후, 보다 구체적인 위반 사례가 보고된다.

------------

1027년 06월 14일 (음)

계미 양주(楊州)에서 주문(奏文)을 올리기를, “장의사(㽵義寺), 삼천사(三川寺), 청연사(靑淵寺) 등의 승려가 술을 빚지 말라는 법을 어기고 합하여 쌀 360여 석으로 술을 빚었으니, 청하건대 법률에 의거하여 단죄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자, 이를 허락하였다.

---------------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불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아 적극적으로 보호, 후원한 국가였다.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에서 불법 숭상이 강조된 이후, 연등회와 팔관회 같은 국가적 불교 행사가 제도화되었고, 승과 제도를 통해 승려 집단은 국가 통치 체계 안에 편입되었다. 이러한 숭불 정책은 사찰의 경제적 기반을 크게 확장시켰으며, 이는 고려 중·후기에 이르러 사찰의 재정 규모와 사회적 영향력이 과도하게 비대해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위의 두 기록은 사찰과 승려의 음주 및 주조 행위가 이미 국가 차원에서 문제시될 정도로 사회적 파급력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후 등장하는 두 기록은 사찰의 세속화가 한층 심화된 양상을 보여준다.


--------------

1056년 09월 17일 (음)

(중략)

“요사이 나라의 역을 회피하는 무리가 승려에 이름을 걸고는, 재물을 불려 생계를 경영하여 농업과 축산으로 직업을 삼거나 상업을 풍습으로 삼고 있다… 상인들과 매매로 통하고 객인들과 술주정과 오락으로 결탁하며… 마땅히 전국의 사원을 정리하여 계행에 정진하는 자는 안착하게 하고 위반한 자는 법으로 죄를 묻도록 할 것이다.”


1131년 06월 미상 (음)

〈인종(仁宗) 9년(1131)〉 6월 음양회의소(陰陽會議所)에서 아뢰기를,

“근래에 승려와 속인, 잡류들이 함께 모여 만불향도라 호칭하고… 사찰의 승도들이 술을 팔고… 무기를 지니고 난동을 부려 풍속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


이 두 기록은 고려 중기 이후 사찰이 수행 공동체의 성격을 상실하고, 상업 활동과 유흥, 심지어 폭력까지 수반하는 세속적 집단으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술은 단순한 소비 대상이 아니라, 계율 붕괴와 세속화를 드러내는 대표적 징표로 기능한다. 또한 두 번째 기록에 따르면 승려와 속인, 잡류가 뒤섞여 ‘만불향도’라는 집단을 형성하고, 염불과 독경을 가장해 술을 팔고 물건을 매매하며 심지어 무기를 지니고 폭력을 행사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사찰이 술과 생필품을 판매하는 공간으로 묘사된 점은, 종교 공간과 시장 공간의 경계가 무너졌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음양회의소(불교 폐단을 논의하고 단속하기 위해 설치하거나 언급한 정부 관련 회의체로 추정)가 어사대(고려 시대의 감찰 기관)와 금오위(수도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 )의 단속을 요청했다는 사실은, 문제의 심각성이 이미 행정·치안 차원으로 확대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사찰 문제가 더 이상 종교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질서를 위협하는 사회 문제로 인식되었음을 뜻한다.


MaaVbNws.png 고려시대 사원의 금주령을 그린 상상화 @젠스파크

다음으로 주목할 표현은 『고려사』에 등장하는 ‘소주도(燒酒徒)’이다. 이는 단순한 음주자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소주라는 특정 주종을 매개로 형성된 집단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도(徒)’라는 용어에는 반복성과 집단성, 나아가 비판적 뉘앙스가 내포되어 있다. 『고려사』 열전 제26권 제신(諸臣)에 수록된 최영전 속 김진(金縝)의 사례는 이러한 의미를 잘 보여준다.


------

권113 >

최영이 홍산전투에서 왜적을 물리치다.


<중략>


이에 앞서 김진(金縝)이 경상도원수(慶尙道元帥)가 되어 도내의 이름난 기생들을 크게 모아 놓고 휘하 장사들과 함께 밤낮으로 술을 마시며 놀았다. 김진이 소주를 좋아하니 군대 내에서 소주도(燒酒徒)라고 불렸다. 군졸과 비장(裨將)들이 조금만 그의 뜻을 거슬러도 번번이 매를 쳐서 욕을 보이자 사람들이 분노하고 원망하였다. 왜적이 합포(合浦) 병영을 불사르고 약탈하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소주도를 시켜 적을 치면 될 것이지 우리들이 어찌 싸울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물러서서 진격하지 않았다. 김진이 혼자 말을 타고 달아나니 마침내 크게 패배하였다. 이에 김진을 폐하여 민(民)으로 삼아 창녕현(昌寧縣)으로 유배 보냈다가 곧 가덕도(嘉德島)로 옮겼다.

---------

소주도.jpg 고려사에서 소주도가 언급되는 부분 @국사편찬위원회


고려 후기의 이 기록에서 문제시되는 핵심은 개인의 음주 행위 자체가 아니라, 술을 중심으로 형성된 집단적 향락과 그로 인한 권력 남용이다. 김진이 즐겼던 소주는 군 내부에서 집단적 소비 문화로 확산되었고, 이는 지휘 체계의 이완과 군기 붕괴로 이어졌다. ‘소주도’라는 명칭은 이러한 집단을 향한 냉소적 평가로서, 술이 공적 질서를 침식하는 매개로 작동했음을 함축한다. 이 사례에서 술은 군사적 실패의 직접적 원인이라기보다, 무책임한 권력 행사와 조직 붕괴를 가시화하는 상징으로 기능한다. 이러한 점에서 ‘소주도’라는 표현은 고려 후기 사회가 음주를 개인적 기호의 차원에 한정하지 않고, 집단 문화로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그 집단성이 사회 질서, 나아가 군사 조직의 규율과 충돌할 경우 강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며, 군대라는 공간에서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졌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고려사』에 등장하는 주천현(酒泉縣)은 술이 부정적 의미로만 인식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다.


----------

주천현(酒泉縣)은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주연현(酒淵縣)으로,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때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내성군(奈城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현종(顯宗) 9년(1018)에 〈원주에〉 내속(來屬)하였다. 별호(別號)는 학성(鶴城)이다.

---------


‘술이 샘솟는 고을’이라는 의미의 주천현이라는 지명은, 술이 풍요와 생산력, 자연 조건의 우수성을 상징하는 언어로 활용되었음을 시사한다. 행정 지명에 ‘술’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는 점은, 고려 사회에서 술이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생활재였음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설명되기 어렵다. 실제 술이 솟아났다는 의미라기보다, 양질의 수자원과 곡물 생산 여건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명명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지명은 이후 조선시대와 근대 행정구역 개편 과정에서도 계승되었으며, 현재의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으로 그 흔적(3)이 이어지고 있으며 술을 주제로 한 술샘 박물관을 운영하면서 그 스토리를 이어가고 있다.

주천.jfif 주천면의 술을 주제로 한 박물관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처럼 『고려사』에 등장하는 술 관련 용어와 사례들은 고려 사회에서 술이 차지했던 위상이 단일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사료에서 문제로 제기되는 것은 대체로 술 그 자체가 아니라, 술이 결합한 행위와 제도적 맥락이다. 사찰에서는 술이 세속적 경제 활동과 결부되며 계율 위반과 타락의 표지로 등장하고, 군대에서는 집단적 음주가 지휘 체계의 붕괴와 군사적 무능을 상징하는 언어로 활용된다. 반면 주천현의 사례에서는 술이 풍요로운 자연환경과 생산력을 상징하는 은유로 사용되며, 오히려 긍정적 가치가 부여된다. 이러한 인식을 통해 술이 단순한 음주 대상이 아니라, 사회 질서와 권력 구조, 집단 운영 방식, 그리고 지역 환경 인식에까지 관여하는 물질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상이한 서술 방식은 고려 사회가 술을 일률적으로 규제하거나 배척한 것이 아니라, 각 사회적 맥락에 따라 문제화하거나 의미를 부여하며 유연하게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결국 『고려사』 속 술의 기록은 고려 사회가 술을 통해 드러나는 현실의 문제를 인식하고 조정하려 했던 과정을 반영한다. 술은 통제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일상과 제도 속에 깊숙이 자리한 생활 요소였으며, 그 양면성 속에서 고려 사회의 구조와 가치관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점에서 술에 대한 기록은 고려인의 일상과 사회 운영 방식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고려사 #술 #금주 #사회적의미 #전통주 #막걸리 #증류식소주 #전통주연구자 #푸드궁금러 #프로참석러 #이대형 #경기도농업기술원



(1) 『고려사』,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s://db.history.go.kr

(2) 『고려사』 사원·풍속 관련 기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s://db.history.go.kr

(3) 주천 (酒泉)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3437?utm_source=chatgpt.com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고려사』로 살펴본 고려시대 술의 정치·경제적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