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의 첫 명절인 설이 지났다. 오랫동안 음력을 사용해온 우리에게 설도 새해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설 이후 또 다른 하나의 명절이 기다리고 있다. 지금은 공휴일도 아니고 의미도 축소되었지만 바로, 정월 대보름이다. 과거에는 그해의 농사가 잘되고 못됨을 또는 개인의 운수를 점치기도 하는 명절이었다.
대보름은 새해가 시작되고 처음으로 보름달이 뜬 날이다. / 출처 - pixabay
어릴 적 정월 대보름의 기억은 즐거운 일들이 많았던 하루였다. 새벽에는 귀밝이술을 마시고 하루 종일 잣, 호두, 밤, 땅콩 따위의 부럼을 깨물려, 갖은 나물과 오곡밥을 먹었다. 저녁에는 친구들과 모여 쥐불놀이를 밤새 한 추억이 있다. 지금 보니 이러한 풍습은 각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귀밝이술을 새벽에 마시면 귀가 밝아질 뿐 아니라 1년 동안 좋은 소식을 듣는다고 한다. 부럼을 먹으면 1년 내내 부스럼이 나지 않는다고도 믿었다. 오곡밥을 지어먹으면서는 풍년을 기원했다. 이런 풍습은 농경문화가 자연스럽게 생활문화로 자리 잡은 것이다. 특히, 이처럼 매년 반복되는 관습을 세시 풍속이라고 불렀다.
쥐불놀이는 음력 정월의 첫 쥐날에 쥐를 쫓는다는 뜻으로 논둑과 밭둑의 마른풀에 불을 붙여 태웠다.
24절기에 따른 명절을 중심으로 하는 세시풍속과 관혼상제에는 조상의 은혜에 감사해하며 술과 음식을 함께 했다. 관례(성년의식), 혼례(결혼식), 상례(장례식), 제례(제사), 향음주례 등의 오례(五禮)에는 반드시 술이 등장했다. 이처럼 과거 우리 역사와 문화 속에서 술은 생활 속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매우 친숙한 존재였다.
전통 혼례의 과정에는 신랑, 신부가 술을 마셨다.
최근 전통주를 복원하는 차원에서 고문헌을 해석한 다양한 전통주들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세시 풍속과 관련된 은 지금 없다. 과거 설에는 도소주(屠蘇酒)라는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면 괴질과 나쁜 기운을 물리치며 장수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은 도소주를 차례상에 올리는 모습은 거의 사라졌다. 오히려 차례주라는 이름의 술들이 차례상에 올라가고 있다. 정월 대보름에 마시는 귀밝이술은 이명주(耳明酒)라고도 했다. ‘동국세시기’에서는 “보름날 이른 아침에 청주 1잔을 데우지 않고 마시면 귀가 밝아진다고 한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지금 귀밝이 술을 판매하는 곳은 없다.
맑은 술을 귀밝이 술로 사용했다.
세시풍속 중 24절기는 사계절의 변화에 따른 농경생활양식의 전통을 가져온 것이다. 그러기에 절기마다 새로운 재료로 술을 담가 마시며 계절의 멋을 즐겼다. 우리에게는 이미 세시풍속 안에 다양한 이야기가 있는 술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술에 있어 스토리는 마케팅의 한 방법으로 매우 중요하다. 현대에 만들어지는 억지스러운 스토리보다 더 재미있고 흥미롭다.
앞에서 언급한 설날(1월1일) 도소주, 정월 대보름(1월15일) 이명주 외에도 단오날(5월 5일)에는 창포를 이용한 창포주, 추석(8월15일)에는 햅쌀을 이용한 신도주, 중양절(9월9일)에는 국화주를 만들어 마셨으며 이외에도 다양한 세시풍속에 맞는 술들을 만들어 마셨다. 법고창신(法古創新; 옛 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이라는 말이 있다. 많은 세시풍속 술은 제조 방법이 전해지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다. 이러한 술들의 제조법을 현대에 있어 재현을 한다거나 아니면 재해석을 통해 제품으로 생산을 한다면 그 자체로 스토리가 있는 전통주들로 탄생할 것이다.
5월 5일 단오에는 더워지는 여름 건강을 도모하기 위해 창포주를 만들어 마셨다
도소주를 마시거나 이명주를 마시는 모습 자체는 미신적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다른 관점에서 보면 재미나는 전통주 마시는 방법이며 전통주의 생활화가 아닐까 싶다. 내년 정월 대보름에는 이명주를 마시는 사람들을 봤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