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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수,열수,경강 그리고 한강 - 첫번째

맑은물이 흐르던 개천 - (1)




여행코스 : 광화문역 - 광교(광통교) - 수표교 - 오간수문 - 영도교 - 중랑천 합수부 - 살곶이다리        

      

경강그리고 한강을 선택한 이유

   한강을 가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강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나왔으며 한강의 다리가 왜 지금에 자리에 만들어 졌을지 생각하며 다니지는 않았을 겁니다. 한강 주변은 일천년 가까이 역사시대에 주요 장소였고 켜켜히 이야기가 쌓인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한강은 그저 땀내듯 강변길을 따라 걷거나 자전거타고 다니기 좋은 곳, 아니면 공원에 휴식하기 위해 찾아오는 곳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강은 이야기 가득한 곳이라는 것을 걸으면서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한강과 한강의 시발점 역할인 청계천부터 시작하여 순환하듯 한바퀴 돌아오는 코스를 만들게 되었지요. 예전 백사장이 넓게 펼쳐졌던 한강의 모습이 있었을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지만 옛 한강의 모습을 찾아보고 한강 유역의 동네가 어떻게 발전하고 변화했는지 찾아 보려 합니다.     


  그래서 “아리수, 열수, 경강 그리고 한강”이라는 제목으로 12개 코스로 나누어 천천히 돌아볼까 합니다. 한강길의 첫 시작은 청계천을 걷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한강을 이야기 해준다면서 왜 청계천을 먼저 하는지 의아해 할 수 있을 겁니다. 예전부터 청계천은 단순히 하천이 아니고 조선 개국 당시에 배산임수의 중요한 풍수적인 요인을 갖춘 하천이 였습니다. 청계천은 한강과 이어져 있고 중랑천과 청계천을 따라 사신이 오기도 하였고 물이 흘러 기운이 통하는 곳이였습니다. 한강을 통해 들어온 상인의 물품은 청계천 주변 시전상인이 모인 곳으로 옮겨져 시장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를 빼고서 한강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청계천 또한 한강과 합류하여 흐르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시작을 하려고 합니다. 근데 또 궁금하겠죠, 그렇다면 청계천 광장에서 시작하면 될 것을 왜 광화문에서 시작을 하는지요? 후후후 궁금한 것은 천천히 걸으면서 풀어드리겠습니다.      

 오늘 걷는 코스는 광화문 광장을 출발하여 청계광장을 거쳐 살곶이다리까지 약 9km 정도 되는 산책하듯 걸을 수 있는 길이며 찬찬히 걸으면서 청계천의 옛모습과 다리이름에 관한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청계천의 시작 광화문과 청계광장     

  청계광장에 오기전에 광화문광장에서 걷기를 시작했습니다. 광화문광장에서 광화문사거리를 지나 청계광장으로 오기까지 좁은 물줄기 형상이 도로를 따라 이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줄기는 청계광장 분수대를 만나 다시 굽이굽이 작은 또랑을 만들어 청계광장 앞 폭포에 이어집니다. 이는 청계천의 발원이 인왕산 자락에서 이어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옛 수선전도나 한양전도를 보면 알 수 있는데, 경복궁 오른쪽을 따라 길게 그려진 물줄기가 보일겁니다. 이것이 청계천 발원지와 상류지역을 표시한 겁니다. 지금은 대부분 복개 또는 토지개발을 위해 묻혀 보이지 않지만, 광화문 광장을 조성하면서 청계천의 물줄기를 다시 살려놓았습니다.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 이해가 되실 겁니다.

(이미지 1 : 한양전도)     


 간단하게 청계천에 대한 이야기를 해드릴까 합니다. 청계천의 옛 이름은 개천(開川)'이라는 불리웠는데 '내를 파내다'라는 의미로 자연상태의 하천을 정비하는 토목공사의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조선 초기부터 물관리를 위해 하천 정비를 하였고, 개천 공사를 계기로 ;개천‘이라고 불리우다가 인왕산아래 백운동부근을 흐르는 청풍계천(淸風溪川)에서 발원하였다고 하여(해설-맑은 물이 흐르는 곳)이라고 해서 ‘청계천’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청계천이 조선시대에 중요하게 자리잡은 이유는 풍수지리상의 이유때문이기도 합니다. ‘배산임수‘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명당 자리는 뒤에 산이 있고 앞쪽에 물길이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 물길이 어디일까요? 한강이였을까요? 청계천이 임수에 해당합니다. 우리나라의 강물은 대부분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릅니다. 한강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도성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청계천은 서쪽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 중랑천과 만나 한강에 이릅니다. 특이한 지리적 특성을 가졌기에 조선초기부터 명당수로써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청계천을 관리하기위해 태종때는 ‘개천도감’을 설치 운영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청계천은 자연하천이였었는데 큰 비가내리면 주변 민가로 물이 넘쳐 피해를 입히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치수를 위해 청계천 바닥을 긁어내고 하천 양옆으로 둑을 쌓았었습니다. 어찌보면 지금의 청계천 모습과 비슷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처럼 높게 쌓여 있지는 않았습니다. 옛 사진에서 보듯이  축대를 쌓아서 청계천 물 흐름을 좋게 하는 정도였습니다.     


 청계천의 치수사업은 세종을 거쳐 영조에 이르기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세종은 지천(支川)과 작은 세천(細川)의 정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특히 종로 남북 쪽으로 늘어선 시전행랑(市廛行廊) 뒤편에 도랑을 파서 물길을 하천 하류에 바로 연결시키는 공사를 했다고합니다. 여기서는 알 수 없지만 시청아래 군기시 주거지유적이나 공평동도시유적지를 보면 돌담이 쌓인 길 옆에 도랑이 있는 것을 보실 수 있는데 왜 이런 시설이 있었는지 이해가 되실 겁니다. 그래서 도심의 홍수를 예방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합니다.      

 세종때 주목할 만한 사건은 청계천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가 중요했었습니다. 청계천은 풍수상으로 중요했기 때문에 맑게 관리해야 한다는 의견과 성안에 백성들이 많이 살다보니 생활 오수를 버릴 수 있는 배출구로 청계천을 활용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의견이 충돌하게 되었죠. 세종은 후자의 주장을 받아들임으로써 청계천은 생활하천으로 결정하였고, 조선왕조 500년 동안 도성에서 배출되는 많은 생활쓰레기를 씻어내는 하수도로서 기능을 함으로써 도성 전체를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도성의 인구는 조선 후기가 되면서 더욱 늘어나 치수에 대한 생각이 더욱 간절해 졌는데 영조 때, 다시 한 번 청계천을 뒤엎는 일을 합니다. 말 그대로 청계천 바닥을 준설하고 석벽을 쌓아 도성 내 물길이 시원하게 뚫리도록 말이죠. 57일 동안 20만 명이 동원된 엄청난 일이였고, 13년 후 다시 한 번 추가 작업을 영조가 나서서 합니다. 이번에는 일반 백성의 노역으로 하지 않고 훈련원, 금위영, 어영청 소속의 삼군이 투입하여 진행했고 주로 구불거리는하천을 바로잡고 제방을 쌓는일을 주로 하였다고 합니다.      


 6.25전쟁 후 청계천은 피난민들이 몰려 살면서 판자촌이 형성되었고 오염이 되기 시작하면서 60년대  청계천 복개를 단행합니다. 그리고 2003년에 복개된 청계천을 다시 복원하는 작업을 단행하여 지금에 모습을 갖추게 되었죠.. 참 우여 곡절이 많은 청계천입니다. 청계천에는 모전교부터 시작하여 고산자교까지 총 22개의 다리가 있습니다. 옛 모습과 이름이 남은 다리도 있지만 대부분은 청계천 복원하면서 놓인 다리입니다. 나름에 심사숙고하여 다리 이름을 붙였습니다. 다리 이름만 알아도 청계천이 달리 보일 겁니다.     


     

 청계광장에서 시작하여 만나는 첫 번째 다리가 모전교입니다. 모전은 시전중 과일으르 파는 과전을 모전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다리 주변에 모전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이것도 조선초기에 조성된 석교였다고 하네요. 지금은 이름만 남았습니다.^^          


 아름답게 슬픈다리 광통교      

  현재 청계천의 다리는 22개 정도 됩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만해도 8개 내외 였다고 합니다. 그중에 두번째 만나는 다리가 광통교입니다. 이 다리에는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는데 하나씩 짚어볼까 합니다.      

 우선 다리 이름이 수선전도에는 대광교로 기록되어 있고, 도성지도에는 광통교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현재는 광통교라고 불리우지만 예전에는 광교라고도 불리웠습니다. 광교는 들어본 명칭이죠? 광통교는 궁으로 들어가는 중요 다리였으나 흙을 쌓아서 만든 토교 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홍수만 지면 무너지지 이를 보완하기 위해 태조가 석축을 쌓아 다리를 만들게 됩니다. 그런데 석축자재가 없다보니 신덕왕후묘의 방풍석을 뽑아다가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복동생이였던 박석을 세자로 삼았던 것의 복수라고 할까요. 한양도성 십리안에서는 돌을 채취할 수 없고, 성안에 묘를 둘 수 없다는 성저십리의 명분을 활용한 측면도 있을 수 있다고 보여집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광통교는 다른 다리에 비해 무척 아름다운 구조를 가지고 있고 폭이 넓어 백성들에게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리가 넓다보니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아서 정월 대보름이면 여기서 답교놀이(다리밟기놀이)를 했다고 합니다. 광통교 주변은 조선시대 시전상인들이 많았던 중심가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넓은 다리가 있어야 하는건 필연이었을 겁니다. 영조시대에도 하천 정비사업을 꾸준히 진행하였었는데 정비가 끝나고 광통교에 나와서 완성된 석축을 살펴본 후, 역부들의 공로를 치하하고 별도의 관리부서인 「준천명(濬川銘)과 소서(小序)」지어 자신의 공로를 위로했다고 합니다. 미국이 대공항을 겪을 때 루즈벨트 대통령은 토목사업을 통해 극복한 사례가 있죠. 보통 뉴틸정책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정책을 영조또한 펼쳤습니다. 바로 청계천 준천사업이였죠. 이당시 5만여 명을 고용하여 구제에 나섰다고 합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공공근로사업과 유사한 정책이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미지 7: 일제강점기 광통교)    

(이미지 7 : 광통교 다리밟기)

(이미지 7: 현재 광통교 모습)

 

 청계천을 걷다보면 앞서 얘기했던 한양의 옛모습을 담은 타일로 만들어진 지도를 보실 수 있습니다. 수선전도라고 하는데요. 꼭 보시고 가면 좋겠습니다.          


청계천의 수위를 재다 수표교     

 광통교를 지나 청계천을 걷다보면 하천 양쪽으로 산책길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어느쪽으로 가도 상관없지만 하천 하구로 갈수록 길이 넓어지는 쪽은 동대문 방향으로 걸을 때 왼쪽 산책길을 따라 걸을 때입니다. 길도 넓고 바닥이 딱딱하기는 하지만 비오는 날에도 걷기 적합한 곳이 이쪽입니다. 종로 3가 부근에 다다르면 나무로 만든 다리가 보입니다. 원래는 마전교(馬前橋)라고 불리웠는데 주변에 ‘마전‘이라는 상권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며 세종때 청계천의 수위를 계측하기 위해 수표석이 세워지면서 수표교라고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원래는 석교인데 지금보면 나무로 만들어진것처럼 보이죠? 실제로 수표교의 원형은 청계천 복개공사 하면서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졌습니다. 그곳에 가면 원형의 다리와 수표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청계천의 옛 모습은 양옆으로 넓게 펼쳐진 형태 였습니다. 그래서 준설을 통해 물이 잘 빠지도록 만들었는데 홍수가 지면 물이 많아 양옆마을로 넘치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청계천의 수면 높이를 확인해야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표석이 수표석이였다고 합니다. 지금의 청계천 모습을 상상하면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미지 8 : 옛 수표표 모습)
(이미지 8 : 수표석의 모습)
(이미지 8 : 장충단의 수표교)

(이미지 8 : 현재의 수표교 모습)


 현재 종로 5가 광장시장이 있는 곳에 을지로와 연결된 다리가 마전교입니다. 실제 마전교라기보다 옛 이름을 차용하여 만든 다리로 보시면 됩니다.


 청계천 주변에는 상인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대형 공사를 진행함에 있어 백성들의 불편함을 아랑곳없이 왕이 명한대로 신속하게 진행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영조는 준천을 시행하기에 앞서 수 차례에 걸쳐 그 시행여부를 조정의 관리와 백성들에게 물어본 다음 확인 및 동의를 구한 후 진행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진행하려다가 조정과 백성의 반발로 시행을 중지하고 다시 백성과 조정을 설득하는 작업을 하고, 마침내 1759년(영조 35)년 10월에는 준천을 관리할 기관으로 준천사(濬川司)를 설치하고 준천 사업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대단한 왕이였죠. 어찌보면 진정한 민주주의 식 사업을 진행한 분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미지 9 : 영조의 준천시사열무도)  

        

 계속해서 청계천을 따라 걸어볼게요. 조금만 더 걸어가면 한양도성의 경계인 흥인지문과 도성이 있었던 자리를 지나갑니다.          


  다음편에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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