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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수,열수,경강 그리고 한강 - 두번째

맑은물이 흐르던 개천 - (2)




여행코스 : 광화문역 - 광교(광통교) - 수표교 - 오간수문 - 영도교 - 중랑천 합수부 - 살곶이다리 

                  

 청계천은 한양도성을 벗어나 한강으로 이어집니다. 도성이 한강을 가로막을 수 없기에 물길을 만들고 관리하게 했죠. 그 주변에도 청계천으로 모여드는 하천이 있어 오간수문 뿐만 아니라 이간수문을 만들어 물길이 흘러가게 하고 다리도 만들었습니다. 청계천 옆에는 흥인지문이 있어 강원도와 경기도 이천, 광주 지역으로 가는 주요 관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청계천과 흥인지문에 얽힌 이야기도 제법 많습니다. 이제는 도성 밖을 흘러가는 청계천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흥인지문 한양도성 밖은 어떠했을까요? 현재 DDP가 자리잡고 있는 곳은 조선시대 훈련원이 있었던 장소였고, 흥인지문 앞은 훈련원에서 근무하던 병사들이 식솔들이 물건을 사고 팔기 위해 시장이 조성되었던 장소 였습니다. 게다가 관리들이 오가며 드나들던 길목이기도 했었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곳, 그러다 보니 청계천 관리는 더욱 신경 쓰였을 것입니다.          


성안의 물을 관리하라 오간수교 흥인지문     

  청계천은 한양도성을 깃점으로 성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옆에는 흥인지문이 자리하고 있어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었습니다. 지금 지나가는 청계천 벽 왼쪽을 보시면 5개의 아치로된 문이 보입니다. 이를 오간수문 또는 오간수다리라고 합니다. 아치모양을 보통 ‘홍예‘라고 부르고 이모양의 문을 홍예문이라고 합니다.      

 청계천은 한양도성 때문에 막힐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홍예를 설치함으로써 유유히 한강으로 흘러갈 수 있었습니다. 원래의 오간수문은 이처럼 청계천 벽면에 세워졌던 것이 아니라 청계천을 가로질러 성곽아래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5개의 홍예가 있어서 오간수문이라고 부르며, 홍예를 연결하고 그위에 성벽을 쌓았고, 5개의 구멍을 통해 청계천물이 원활하게 흐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었습니다. 일제강점기때 일본이 더 단단한 다리를 만들어 주겠다고 하면서 그당시 신기술이였던 콘크리트 다리를 만들게 됩니다. 그러면서 성곽도 헐려지고 오간수문도 무너졌었습니다. 이후 청계천이 복개 되면서 사라졌다가 청계천 복원을 통해 다리의 기초모습이 나타나 현재위치에서 복원하기보다 사라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재도 오간수교는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청계천에서 가장 넓은 다리일 것입니다.     

(이미지 9 : 옛 오간수문 모습)     


 흥인지문은 방위를 위해서도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청계천의 오간수문도 방어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오갈 수 없도록 창살을 설치하였는데, 이 사이를 이용하여 도성 안에서 죄를 지은 자가 도성을 빠져 달아나든가 혹은 밤에 몰래 도성 안으로 잠입하는 사람들의 통로로 곧잘 이용되기도 하였습니다. 물만 흘려보내려고 했는데 사람들이 머리를 써서 성밖을 도망갈 때 쓴거죠. 그 예로 명종 때 임꺽정의 무리들이 도성에 들어와 전옥서를 부수고 도망갈 때도 이 오간수문을 통해 달아났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만들어 놓은 쇠창살은 청계천이 많아지는 홍수나 장마때에는 오히려 물의 흐름을 방해하기도 했습니다. 물에 밀려 내려왔던 나뭇가지 들이 오간수문의 쇠창살에 걸려 물의 흐름을 방해한 거였습니다. 그래서 조선 말에는 결국 헐리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미지 10: 옛 지도에 나타난 청계천 오간수문)    

 

  오간수교 주변에는 청계천 준설하고 나온 흙을 쌓아놓은 곳이 있는데 산처럼 보여서 가산(假山)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을지로 6가에 가면 방산시장이 있습니다. 여기서 방산은 무슨 의미일까요? 방산동 동명은 마을 부근에 있는 가산(假山) 또는 조산(造山)이라 부르던 곳에 무궁화꽃을 많이 심어 그 꽃향기가 발산된다, 즉‘방산’이라고 불러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청계천 준설에 따른 흙을 쌓아놓은 양이 엄청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성밖을 나왔으니 편한 마음으로 걸으면 좋겠습니다. 인적이 점점 줄어들기 때문에 걷기도 수월할겁니다.          


영영 돌아오지 못할 그님을 보내며 영도교     

 오간수문을 지나 소소한 몇 개의 다리를 지나왔습니다. 대부분 청계천 복원하면서 생긴 다리이며 마을의 이름이나 유명인사, 사건을 따서 다리 이름을 붙였습니다. 맑은내다리는 청계천의 순 우리말이며, 다산교는 정약용의 호를 따서 붙인 다리이름이자 다산로가 인접해 있어서 다산교라고 붙였습니다.      

 여기 영도교는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귀양갈 때 그의 비인 정순왕후 송씨가 이곳까지 나와 서로 영영 이별하였다 하여 영이별다리 혹은 영영건넌다리라고 전해지는 전설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흥인지문 옆에 오간수문(五間水門)이 있어서 동대문 방면에서 왕십리 쪽을 가려면 영도교를 건너야만 되었기 때문에 이 다리의 교통량은 몹시 빈번하였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세종때부터 상왕이였던 태종의 문안인사 및 군사적인 필요성에 의해 석교를 만들기 시작하여 태종이 사망하고 중단되었던 다리 건설은 성종에 이르러서 절의 스님들을 동원해서 살곶이다리(전곶교, 전관교)와 함께 이 곳에 돌다리로 중수(重修)하고 어필(御筆)로 ‘영도교’라 명칭을 지어줬습니다. 그전에는 나무 다리였다고 합니다. 오늘 코스의 끝은 이 시기에 만들어진 살곶이교에서 마무리 합니다.      

 그 후 정순왕후 송씨는 지금의 청룡사 승방에 있던 정업원(淨業院, 현 숭인동)에 들어가 시녀 셋을 데리고 일생을 동망봉에서 영월을 바라보며 남은 인생을 살았고, 이 영도교는 고종 초기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헐어다가 석재로 썼기 때문에 이후에 없어졌다 합니다. 이후 일제시대에 콘크리트 다리를 설치하였고 청계천 복개를 통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복원 후 다시 다리가 생겼지만 그 당시 모습은 아닙니다.     

 생각보다 청계천에 얽혀 있는 이야기가 많죠.  고산자교까지 걸어가서 좀 쉬겠습니다. 청계천 걷는 동안에 처

음보는 청계고가 기념물과 판자집 모형도 보실 수 있습니다.   


       

김정호의 자취 고산자교      

  여기까지 오기전에 몇 개의 다리를 더 만났습니다. 그중에 생뚱맞지만 소개하고싶은 다리가 있는데 무학교를 얘기할까 합니다. 조선 건국시 태조의 명을 받고 무학대사가 한양(고려시대 남경)에 와서 도읍지 자리를 돌아봅니다. 그러면서 동쪽으로 가면 좀더 좋은까 싶어서 십여리를 찾아온 곳이 왕십리(왕십벌) 였는데 이러한 이유에서인지 청계천을 가로지르는 도로의 명칭이 무학로이며 그위에 지어진 다리가 무학교입니다. 도읍의 자리를 보기위해 십리를 더 걸어왔다는 이유로 왕십리라고 부르지만 이 지명은 예전부터 존재하던 지명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무학대사의 노력을 좋게 보기위한 이야기로 변화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쉬고 있는 고산자교는 다리 위로 고산자로가 연결되어 있고 지도왕 김정호의 호를 따서 명칭을 붙였다고 합니다. 고산자교까지 청계천 복원을 통해 만들어진 22개 다리 전부입니다. 이후에는 돌다리가 몇 군데 있고 살곶이다리까지 가야 강을 건널 수 있습니다.     

 근대에 들어와서 청계천이 복개되고 고가도로가 생기면서 청계천의 모습은 볼 수 없었습니다. 2003년부터 청계천 복원공사를 하면서 다시 우리가 보는 청계천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면서 청계천의 맑은 물은 서울숲에 가면 취수장이 있는데 그곳에서 정수한 물을 끌어다가 쓰고 있습니다. 자연 상태로는 물이 없어 하천이 생길 수가 없기에 취한 해결책인 셈입니다.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맑은 물이 흐르게 되었고 중랑천 합수부도 깨끗해지면서 다양한 생태계가 복원되어 철새들이 몰려오게 됩니다.     

(이미지 11 : 답십리 판자촌)

(이미지 11: 청계천 하류 판자촌 모습)

(이미지 11 : 한국전쟁 후 청계천 판자촌 모습)     


  예전에는 중랑천 주변, 답십리 일대는 판자촌으로 가득차 있었었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거처를 마련할 수 없어 자리 잡았던 곳이 청계천 주변에 판자촌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점점 늘어났고 청계천을 통해 하수가 밀려 나와 냄새와 오물로 가득하여 썩은 냄새가 진동하였다고 합니다. 결국 1960년대 후반 청계천은 해결책으로 복개하는 것으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그 위로 청계고가도로를 설치하여 서울중심부에서 외곽으로 차량 소통이 원활하게 만들었습니다. 이후 2000년대 초반 청계천 복원을 통해 현재의 모습으로 태어났습니다. 답시리 이부근도 정비가 되고 개발 되면서 판자촌은 사라지고 지금에 청계천 모습으로 바뀌었죠.     

(이미지 12: 청계천 복개 후 고가도로 건설)

(이미지 12 : 청계천 복개공사)

(이미지 12: 청계 고가도로)     


 여기부터는 내부순환로가 위로 지나가기 때문에 비가와도, 눈이 내려도 걷기 좋은 길입니다. 여기서부터 살곶이다리까지는 편하게 걸으시면 됩니다. 주변에 탁트인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이야기를 듣는것보다 훨씬 나을겁니다.           



청계천의 끝 중랑천 합수부 살곶이다리     

 청계천은 중랑천을 만나면서 청계천이 끝납니다. 중랑천과 더불어 더 넓은 하천이 되어 한강까지 흘러갑니다.          

이렇게 청계천의 시작과 끝을 걸어본 분들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양옆을 보면 답십리동이나 마장동쪽은 많이 개발되어 변화되었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여기까지 판자촌이 있었던 곳입니다. 그러다 재개발로 철거되고 현재의 모습으로 바뀌었죠. 그리고 더 이상 청계천은 중랑천에 스며들어 사라지듯이 말이죠. 중랑천은 강폭이 제법 넓었던 곳입니다. 하지만 쉽게 걸널 수 있는 강은 아니였습니다. 그래서 중랑천이 끝나는 자리에는 포구가 있었고 살곶이다리 건너편에 있는 뚝섬도 포구로 기능을 하였습니다. 지리적인 중요성과 수시로 다녀야 하는 곳이다보니 나루보다는 다리가 필요한 곳이라 성종때 영도교와 함께 살곶이다리가 만들어졌습니다. 저 살곶이 다리는 영동지방을 가기위해 건너야하는 중랑천을 걸널 수 있는 유일한 다리였으며, 아마도 단종이 유배갈때도 여기를 통해 가지 않았을까 합니다. 살곶이라는 지명은 한강과 중랑천이 만나는 성수동 지역에 형성된 평야를 부르던 이름인데, 다른 이름으로 둑도 또는 뚝섬이라고도 불리웠습니다. 현재는 서울숲이 자리를 잡고 있는 곳입니다.     


  오늘은 살곶이다리가 보이는 여기까지입니다. 다음에는 살곶이다리를 시작하여 본격적인 한강을 만나러 갑니다. 뚝섬과 한강하구의 포구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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