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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한강을 아시나요?

사진이 있는 길여행



 한강은 그저 편하고, 탁트인 풍경속을 걷는 곳, 쉬는 곳, 달리는 곳, 야경이 아름다운 곳으로 보았다. 자칫 지루할 수 있는 한강은 재미있게 걸을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고 생각해 왔다. 그늘도 없고 사람만 많은 그런 곳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세세히 들여다 보면 한강은 이야기 넘치고 볼거리 풍성한 곳이다. 단순히 한강 옆 공원을 따라가지 말고 살짝 강변을 벗어나 도심 속으로 들어간다면 이쁜 공원과 이야기가 있는 문화와 역사의 장소, 그리고 낮은 야산이 가득한 아름다운 풍경이 즐비하다. 조선시대 청나라 사신이 들어오면 가장 먼저 하고 싶거나 해주어야했던 행사가 한강 주변을 배를 타고 양화진과 한강진 일대 풍경을 유람시켜 주는 것이였다고 한다. 지금 그곳은 역사의 상처가 남아 밋밋한 모습처럼 보이지만 불과 50년 전만 해도 한강은 이런 모습이 아니였다. 역사의 현장에서도 빠질 수 없는 곳이 한강이였다. 사신이 드나들고 상업이 번성했던 것도 한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였다. 이렇게 길고 길었던 역사 속 장소였던 한강 주변에 잘 알지 못했던 사실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한강의 시작과 명칭의 유래      


  일반적으로 알고있는 한강의 기원은 태백의 ‘검룡소’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검룡소에서 발원하여 여러 하천이 모여 남한강을 이루고 두물머리(양수리)에서 북한강을 만나 한강이 된다. 하지만 옛 자료를 보면 조금 다른 내용의 한강의 기원을 볼 수 있는데, 조선시대 지리서인 ‘택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한강의 발원은 오대산 ‘우통수(于筒水)라고 소개하는데 이 당시에는 한강의 기원을 남한강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북한강은 한강의 기원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소개된 우통수에 대한 소개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 오대산 서대 밑에 솟아나는 샘물이 있는데 곧 한수(韓水)의 근원이다. 권근의 기문에 “서대의 밑에 솟아나는 샘물이 있으니 물 빛깔과 맛이 딴물보다 훌륭하고 물을 삼감도 또한 그러하니 우통수라 한다. 서쪽으로 수백리를 흘러 한강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또 다른 한강 발원에 대한 내용을 보면, 남한강의 또다른 발원은 속리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남한강의 시작이라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북한강의 기원은 어디일까? 북한강은 금강산 아래 만폭동에서 기원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 한강의 원류는 셋이 있는데 그 하나는 강릉부의 우통에서 나오고, 하나는 회양부 금강산의 만폭동에서 나오고, 하나는 충청도 보은현 속리산 문장대에서 나온다.” - 유득공의 사군지(四郡志)에서 발췌      

    

  이처럼 옛 기록에서는 한강의 시작은 현재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와 한강을 실측 탐사하면서 물줄기가 더 큰 곳이 검룡소라는 것을 확인하였고 남한강의 발원지는 검룡소라고 국립지리원에서도 인정하였다. 아마도 눈으로 보고 확인한 것과 장비를 사용하여 확인한 것의 차이이거나 아니면 당시 풍수지리적인 이유로 한강의 기원을 비정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처럼 한강의 시작은 동쪽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향하여 약 514km가 되며 예로부터 한양으로 들어오는 물길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시대에 따라 한강의 이름은 다양하게 불리웠고 서울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도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웠다.        


  삼국시대에는 ‘아리수‘라고 불리웠고, 고려시대에는 ‘열수(洌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한강이 아닌 한수(韓水)라고 불리웠고 한양 부근을 지나는 강을 ‘경강‘이라고 불리웠고 한강이라는 말은 한강진을 지나는 물길이 이름이였다. 우리가 알고있는 한강이라는 명칭은 여기서 나온 말이다. 그리고 한강의 상류지역으로 올라가면 남한강 지역인 여주에서는 ’여강‘이라 불렀고 그 위쪽 원주지역에서는 ’남강’이라고 불리웠다. 경강유역도 지역에 따라 부르는 명칭이 따로 있는데 서강, 양화진 구역은 ‘서강‘ 또는 ‘서호‘라 불리웠고, 동호대교가 있는 곳은 ’동호‘라고 불리웠다. 한강하류로 내려가면 양화강, 조강 등으로도 불리웠다. 이처럼 다양한 명칭을 가지고 있는 한강에는 나름에 이유가 있는 나루가 형성되어 마을이 생기고 교통의 요지로 발전하였다. 나라라는 명칭은 ’나루‘에서 유래된 것을 알면 놀라울 수 있다. 한강은 그저 흐르지만 사람에게 있어서는 생명이 움트는 자리였다.   

[ 한강의 발원지 지도]



가장 오래된 한강의 다리였던 광진교     


 한강은 무척이나 길다. 모든 곳을 얘기하기보다 서울권역으로 좁혀서 이야기를 풀어가려 한다. 경강의 권역은 동쪽으로는 두모포가 있었던 중랑천합수부부터 서쪽은 양화대교가 있는 곳까지를 경강이라고 불리웠고 이곳에도 우리가 몰랐던 사실들이 숨어있다. 먼저 한강에 건설된 오래된 다리를 꼽으라면 한강철교와 인도교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광나루역에 있는 광진교도 오래된 다리였다고 얘기하면 대부분 놀라는 반응을 보인다. ‘광진(廣津)‘이라는 지명은 말 그대로 강폭이 넓은 나루였다는 뜻이며 한글로 풀면 ‘광나루‘가 된다. 그래서 5호선 천호역 앞을 지나는 역 이름이 광나루역인데 왜 이런 역명이 붙었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광진(광나루)은 경기도 광주 및 용인지역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나루였으며 강북의 광나루와 강남의 삼전도, 이후에는 송파나루와 연결하여 배가 다녔던 곳이다. 서울의 광희문을 나서서 중랑천 살곶이다리를 건너 광나루로 이어진 길을 따라 경기도의 내륙지역과 관동지방과 충청지역으로 이동하는 길목이기도 하다. 이렇게 빈번하고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은 근대화 과정에서 뱃길을 대신할 육로가 먼저 들어서게 되는데 광진교는 서울에서 3번째로 다리가 세워져 1936년에 완공된 꽤 오래된 다리이다. 이후 오래된 다리를 철거하고 다시 건설하여 2003년에 다시 개통하였고 이후 교통량이 증가함에 따라 교량이 소화할 수 있는 교통량이 부족하다보니 바로 옆에 천호대교가 건설되면서 역사의 중심에서 빠지게 된다. 이후 다시 한 번 개조를 통해 사람이 다니기 좋은 다리로 거듭나 지금에 이르렀고 광진교는 TV드라마의 촬영지로도 소개되기도했던 곳이다.     

[ 옛 광진의 모습 - 경교명승첩 발췌]     



한양을 들어가는 길목 두모포와 뚝섬          


 중랑천아래 한강합수부 근처에 가면 오래된 돌다리인 살곶이다리를 마주하게 된다. 살곶이다리는 뚝섬과 성동구를 잇는 교통로에 있는 다리이며 100m가까이 길게 만들어진 돌다리이며 광진으로 이어지는 길목이기도 하다.      

  예전 기억을 가지고 계시는 분들은 이곳에 뚝섬 경마장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을 것인데 뚝섬에 있던 경마장은 현재 과천경마장으로 옮겨졌고 비워진 공간에는 서울숲공원으로 조성하였다. 그렇다면 뚝섬이라는 말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조선 초기에는 이곳을 살곶이벌 이라고 불리웠는데, 군사훈련을 많이 하였고 군대 사열도 했었다고 한다. 군사훈련을 할 때 왕이 참여하면서 왕을 상징하는 깃발을 세워 놓았었는데 이를 ’둑기’라 하는데 둑기를 세우고 승전을 기원하던 제사도 지내던 곳이 뚝섬일대였다. 둑기가 세워진 섬이라는 뜻에서 ‘둑도‘라고 불리웠다가 발음이 변하여 뚝도, 뚝섬으로 변하여 지금도 지하철역 명칭에 남아 있다. 게다가 뚝섬에는 군마를 키우는 목장이기도 하였는데 건강하고 좋은 암말이 많을수록 좋은 말을 나을 수 있었기 때문에 암말을 많이 길렀다고 해서 이 주변을 ’자마장리(雌馬)’라고 불리웠고지금에 ‘자양동‘으로 변하였다.     


 뚝섬으로 들어가기 전, 중랑천 하구에는 두모포라는 중요한 포구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은 강원도 등 한강 상류에서 땔감이나 목재를 싣고 내려와 하역하는 배들이 많았던 곳으로 두모포(豆毛浦) 라는 이름은 한강과 중랑천이 만나는 두 물줄기 사이에 있다는 의미이며 ‘두물개’ 또는 ‘두뭇개’라고 불리웠었다. 지금은 흔적조차 없는 포구이지만 옥수역 아래에 가면 'doomo' 라는 글자의 슬로건 문구를 볼 수 있는데 예전에 두모포가 근처에 있었음을 알려주는 단서이기도 하다. 두모포는 한강을 접하는 포구 중 한양도성에 가까운 곳이였으며, 일본에서 건너온 사신들이 두모포에서 내려 광희문을 거쳐 동평관(東平館)이라는 관리용 숙소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으며 최근 ‘나랏말싸미’라는 영화에 보면 일본의 승려가 팔만대장경을 내어달라고 읍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곳의 무대가 동평관이자 두모포를 통해 들어온 일본 승려의 모습이 그려졌었다. 조선 초기에는 다른 포구보다 두모포가 더 중요하고 큰 포구였는데 한강에 밀물이 밀려올때면 바닷물이 두모포까지 올라와 배를 정박하고 운용하기 편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이후 한강의 토사가 쌓이면서 조선 후기에는 중심포구가 마포일대로 바뀌면서 두모포는 역사속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두모포 주변은 풍경이 좋아 낚시하는 배와 풍경을 관광하기 좋은 아름다운 장소이기도하였다.

[이미지 3 도성도- 두모포위치]

[지한마정색도 -뚝섬의 말 목장그림]        


  

한강에 밤섬을 폭파하라밤섬과 서강대교     


 한강유역에는 많은 섬이 있었다. 그중에 사라진 섬도 있고, 새롭게 만들어진 섬도 있다. 사라진 섬은 대부분 내륙화되었거나 한강개발을 통해 사라졌고 새로 생긴 섬은 인위적인 인공섬이 대부분으로 노들섬과 서래섬, 선유도공원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사라진 섬중에 사라졌다가 자연의 힘으로 다시 생겨난 섬이 있는대 바로 서강대교아래에 있는 밤섬(율도)이다. 예전에 서강나루가 있었고 황해도,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등에서 배를 타고 올라온 세곡이 내려지는 곳으로 마포와 더불어 복잡하고 왕래가 많았던 포구였다. 그래서 서강나루 근처에는 여러 창고가 있었고, 그 중에 하나가 광흥창이며 현재는 광흥창터로 남아 있다. 서강나루에서 조세곡이 모이다 보니 세금을 걷는 ‘공세청‘과 공미를 검사하던 ‘점검청‘ 도 설치되어 있었고, 여기서 확인이 이루어진 세곡은 용산진이나 양화진, 서강나루 위쪽에 광흥창과 도성 안으로 이동하여 보관하였다. 서강대교 아래에서 봉원천 위쪽 나들길을 통해 나서면 신수동인데 옛 지명이 신수철리(新水鐵里)였는데 새로운 수철리 마을이라는 뜻으로 수철은 무쇠를 일컫는 말이여서 이곳에는 농기구 등을 만들거나 국가에 바치는 철기구를 만드는 대장간이 많았던 곳이다. 게다가 거쳐가는 배가 많았기 때문에 수리도 필요하였기에 여러 철기구가 많이 소용되는 장소였다. 그래서 서강대교 아래 밤섬은 이러한 배수리를 주업으로 삼았던 백성들이 많이 거주했었다. 밤알처럼 생겼다고해서 밤섬(율도)으로 불리웠고 1968년까지 밤섬에는 약 62가구 정도가 살았었는데 한강과 여의도 개발을 위해 방죽을 쌓을 필요가 있어 골자재 확보를 위해 밤섬을 폭파하여 그 석재로 여의도일대에 제방을 쌓았다. 이렇게 밤섬은 한강의 역사에서 사라졌고 밤섬에 살던 사람들은 마포구 창전동으로 이주하였고 밤섬에 존재했었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한 제사를 지내던 ‘부군당’ 건물 또한 창전동으로 이전하여 빌라 사이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여러 조각으로 갈라졌던 밤섬은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모래가 쌓이고 퇴적되어 제법 큰 섬으로 확장되었고 사람은 들어갈 수 없는 새들이 주인인 섬으로 탈바꿈하였다. 그래서 서강대교는 다른 대교에 비해 야간 조명시설이 없는데 이또한 밤섬에 살고있는 철새들을 위한 조치이다.     

[밤섬의 모습]      


    

신천강 흐르던 잠실섬을 아시나요?           


 한강에서 사라진 섬 중에 잠실섬을 얘기하면 놀라는 사람들이 많다. 잠실역이 있는 곳은 석촌호수 북쪽에 해당하는 곳으로 40여 년 전에는 섬이였던 곳이다. 1960년대 서울의 지도를 보더라도 현재의 한강본류보다 잠실섬을 기준으로 아래 남편에 있는 강은 ‘송파강’이라 불리웠고 북쪽에 있는 강은 ‘신천‘이라고 불리웠다. 뚝섬에서 잠실섬을 경유하는 도로가 있어 한강을 건너 용인, 광주방향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1970년대 한강을 개발하기위해 가장 큰 섬이였던 잠실도와 왼쪽편에 있었던 부리도, 그리고 그 옆 작은 섬인 무동도 3개 섬을 연결하고 송파강이 흘렀던 남쪽 물길을 막고 북쪽물길을 넓혀 잠실지구라는 육지화된 넓은 땅을 조성하였다. 매립에 필요한 토사는 처음에는 잠실섬의 신천강 일대의 모래와 자갈을 채취하여 사용하다가 자재가 부족해지면서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을 허물어 사용하자는 의견도 있었다고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러한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마침 서울 도심이 확대되면서 발생한 연탄재 쓰레기를 매립해야 했었는데 이러한 상황을 이용해 잠실섬 일대를 매립 진행하였다. 이렇게 육지화 과정에서 옛 송파강의 흔적은 석촌호수로 남아있게 되었다.       


  잠실섬은 조선 초기에 거의 강 북쪽 육지에 붙어있는 섬 이였는데 넓은 강변에 뽕나무를 심어 양잠사업을 국가차원에서 진행하고 장려하기위해 ‘잠실도회‘를 설치하여 운영하였고 이때 나온 말인 ’잠실’이 지명으로 남게 되었다. 한강 남쪽의 잠실은 한남대교 아래 현재 잠원동이라 불리우는 곳까지 잠실이 존재했는데, 성종때 이곳에 만들어진 잠실단지를 ’신잠실‘이라 불렀다가 1960년대 잠실리가 서울시로 편입되면서 송파구 잠실동과 겹치지 않게하기 위해 잠실리의 ‘잠’자와 인근 신동면 신원리의 ‘원’자를 따서 잠원동이라 불리운 것이 잠원동의 유래이다.      


 잠실역에서 롯데월드를 따라 돌아서 걸어가면 동호와 서호 사이에 있는 도로변 옆에 2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는 유리벽을 볼 수 있는데 이를 ‘삼전도비‘라고 하며 삼전도나루에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삼전도나루는 세종 때에 만들어진 나루로 한강나루(한강진), 노들나루(노량진)와 함께 경강삼진으로 나라에서 관리하는 나루였고 세종의 형 양녕대군이 세자에서 물러나 태종의 명으로 경기도 광주에 거처를 마련하고 있을 때 태종의 부름을 받으면 이곳 나루를 이용해 태종이 머물렀던 지금의 자양동에 있는 ‘낙천정‘이라는 별장으로 문안인사를 하러 오갔다고 한다. 이후 삼전나루는 여주 세종릉과 한양의 이성역할을 했던 남산산성를 가기위해 필요한 나루터였으며, 병자호란이후 ’삼전도의굴욕’이라는 사건을 통해 삼전나루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나루가 되었고 그 옆에 송파나루를 주요 나루로 이용하였다. 삼전나루와 송파나루는 지금 석촌호후 근처에 있었던 나루였고 관련된 표지석이 있으며 석촌호수가 에전에는 송파강이였음을 알려주는 근거이기도 하다.      

[송파인근 부리도]

[삼전도비]
[조선말 쓰러진 삼전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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