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산책 #1

왜 남에게 잘해야 하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 공자의 서와 칸트

by 장진우

#"왜 엘리베이터에서 떠들면 안 돼요?", "왜 내 먹을 것을 친구나 동생에게 나눠줘야 해요?"


어릴 때를 떠올려보면, 단순히 어른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린이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은 기분이 나빴던 기억이 많다.

"왜 이렇게 해야 해요?"

"어린 녀석이 말이 많아, 하라면 하지!"

아이가 있는 사람이라면, 아이한테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마라'라고 이야기할 때가 많은데, 어렸을 적의 기억을 떠올리며 어떻게 하면 옛날 사람들처럼 '하라면 해라'가 아닌 논리적이고 설득할 수 있는 방법으로 아이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된다.


'공정함'이란 것에 대한 관념은 생각보다 매우 어린 나이 때부터 생겨난다. 어릴 때부터 존중받는 것은 그 아이가 남을 존중하는 아이로 자라는 데에도 중요하기 때문에 나는 서너 살 아이에게 무엇을 말할 때도 아주 급한 상황이 아니면 최대한 '이유'를 설명해 준다. 너무 급하다면 그 상황이 종료된 직후라도 이유에 대해서 설명을 해준다.

예를 들어 공공장소에서 아이가 소리를 지르거나 뛰어다닐 때 '하지 마라'라고 말할 수 있다. 아이가 '싫어요'라고 대답하거나 '왜요?'라고 되묻는다. 어떻게 말해줘야 할까?


#철학은 신이 없어지면서 생겨났다.


만약, 신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런 경우에 답이 쉬울 수 있다.

'하나님(또는 부처님)이 싫어하셔.'

다른 질문에도 같은 대답을 할 수 있다.

'왜 남을 도와야 하나요?'

'하나님(또는 부처님)이 좋아하셔.'


매우 간단하고 편리하다. 하지만 간단하고 편리하다고 그것이 항상 옳거나 좋은 것은 아니다. 설사 신을 믿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런 식의 설명은 너무 고리타분하고 너무 강압적으로 보인다. 법이 규정하는 부분이라면 (이것 또한 간단히 마무리하는 게 좋은 방식은 아니지만) '그건 불법이고, 그렇게 하면 처벌받으니까.'라고 설명할 수 있지만 법 바깥임에도 분명히 필요한 혹은 해서는 안 되는 것들에 대한 규정과 이유가 필요할 때가 많다.


#공자의 '서(恕)'


춘추전국시대의 '전()'은 싸움, 전투를 뜻하는 말이다. 얼핏 전국적으로 무슨 일이 있던 시대라고 들리지만 낱말 그대로 중국 기원전 700~200년 사이쯤의 수많은 나라가 난립하고 전쟁과 혼란이 가득했던 시대였다. 역설적으로 극한 혼란 속에서 '제자백가'라는 극히 많고 쓸만한 사상들이 튀어나왔다. 사람이 편할 때는 오히려 고민이 필요 없지만 삶이 힘들고 어려울 때 고민이 더 많아지는 탓일 것이다.


로마는 4세기에 기독교를 공인했고, 고구려, 백제는 4세기에 불교를 국교로 삼는다. 이집트의 파라오 같은 강력한 신이 아직 생겨나기 전이고 작고 많은 나라들이 넘쳐나 법체계도 부실했던 전국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엄청난 사회의 혼란을 겪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할 것들- 남을 해치거나 사기 치지 말고, 스스로의 일에 종사하여 개인과 사회에 가치를 더하는 등-의 '이유'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제자백가란 다양한 사상의 홍수가 터져 나온 이유는 오히려 이런 혼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중 공자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할 것을 말하고 싶었고 그 이유를 설명해주고 싶었는데, 신도 없고 법도 없으니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고민이 깊었을 것이다.


800px-Konfuzius-1770.jpg 공자 (출처: 위키피디아)

공자(기원전 571~479 추정)의 사상은 인(仁)으로 집약되고 '덕'과 '예'라는 것이 있지만 사실 실생활에 적용하기 쉽고 이미 우리가 은연중에 적용하고 있는 기본적이고 이해 쉬운 내용은 '서(恕)'이다.

'서'라는 글자는 '용서(容恕)'라는 낱말에 쓰이지만 공자가 사용한 '서'의 뜻은 다음과 같다.


공자는 자공과의 문답에서 연이어 ‘서’란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가하지 않는 것"
(『論語』, 「衛靈公」, “己所不欲, 勿施於人.”)이라고 설명한다.


좋지 않은 행동을 하는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할까에서 흔히 '네가 다른 아이가 뛰어다니고 소리 지르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아요, 싫어요?' '싫어요' '그러니까 너도 그렇게 행동하면 안 돼.'라는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런 설명에 이미 공자의 '서'란 철학이 있는 것이다. 물론 '서'란 생각은 공자만의 발명품은 아니고 수메르의 함무라비 법전 등 여기저기서나 현대의 일반인으로서도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내용이다.


그 뒤로 세상은 종교의 무게에 짓눌리게 된다. 서양에서는 기독교, 중동에서는 이슬람교, 동양에서는 불교와 힌두교 등이 세상을 지배하며 이는 대부분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선택된다. 유발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침팬지 등 유인원이 모일 수 있는 수인 수십 명을 넘어서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협력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종교, 국가 등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며 이를 '인지혁명'이라고 말한다. 수천, 수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나라라는 한 테두리에 묶어놓기 위해서는 '신의 뜻'같은 강력한 사상이나 핑곗거리가 필요했기에 대부분의 고대-중세 국가들은 종교를 채택했다.


#과학혁명, 산업혁명, 그리고 프랑스혁명- 신은 죽고, 혼돈의 시대에 다시 철학이 꽃 피어나다.


"신은 죽었다."

Nietzsche 'Die fröhliche Wissenschaft' (1882)


"신은 아마도 죽었다."(God is dead, perhaps)

Victor Hugo 'Les Miserables'(1862)


오랜 시간 중세를 지배한 종교는 독선이 더 심해졌고, 면죄부를 팔았으며 사람들은 점점 신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한다. 르네상스는 신이 없이도 인간이 아름다울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으며, 종교혁명은 곧이어 과학혁명, 산업혁명, 그리고 마침내 절대 왕정과 봉건제도를 무더뜨리는 근대혁명으로 이어진다. 과학이 발달하니 사람들은 점점 신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신이 없는데 그러면 이제 사람들은 막살아도 되는 건가? 천국도 지옥도 없고 내가 숨어하는 행동을 낱낱이 지켜볼 절대자도 거짓이었다는데, 그렇다면 사회는 다시 원시 사회처럼 혼란스러워지지 않을까? 신이 없는데도 사회를 지탱해 줄 이론이나 규범이 없을까?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치며 다시 한번 철학은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다. 존 로크(사회계약설), 헤겔, 장자크루소, 몽테스키외, 칸트 등이 모두 이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칸트.


#조건 없이, 사람을 목적 그 자체로 대하라

800px-Immanuel_Kant_-_Gemaelde_1.jpg Portrait of Kant, 1768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알려졌듯 평생 자신이 살던 지방을 떠나 멀리 여행해 본 적이 없으면서도 동시대 철학자 누구와도 다른 독보적인 사상을 말한다. 너무 독보적이고 신기해서 한 번은 칸트가 태어나고 살았던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 동쪽 프로이센 지역이었으나 2차 세계대전 후 러시아에 편입되어 칼리닌그라드로 바뀜)'란 지방을 찾아본 적도 있다.


Prussian_clans_13th_century.png 13세기 프러시아 지도,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

칸트는 1724년 루터주의 신앙을 믿는 독일계 프러시아 가정에서 태어났다. 비록 칸트는 신을 믿었다고 알려졌지만 그의 사상은 신을 굳이 그 이유로 두지는 않았다. 다시 말해 신이 시켜서 인간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게 아니고 그냥 인간이기 때문에 그래야 한다고 설명한 것이다.


정언명령(定言命令: Categorical Imperative)은 한자로 쓰니 어렵게 느껴지지만, 쉽게 풀이하면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함'이란 뜻이다.


앞서 어린아이에게 설명해야 되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한 아이가 놀이터에서 줄 서 있는 미끄럼틀에 새치기를 했다. 이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공자의 '서'가

"네가 줄 서 있는데 새치기를 당한다면 기분이 좋지 않겠지? 그러니 너도 새치기를 하면 안 된단다."

라고 설명한다면, 칸트의 정언명령은

"새치기를 하는 것은 나쁜 행동이므로, 줄 서서 차례를 지켜야 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새치기를 다른 사람에게 당하지 않기 위해서나, 2차적으로 얻어지는 놀이터의 평화 같은 이득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놀이터에 다시 올 일이 없어도, 내가 줄을 잘 서도 다른 아이들은 모두 새치기를 하더라도 그래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니까 하라는 것이 칸트의 정언 명령이다. 칸트는 정언명령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내용으로 보편적 원칙 "자신이 생각하는 기준이 항상 모든 사람에게 타당한 보편정인 원칙이 되게끔 행동하라."이나 "사람을 (남 또는 나 자신 스스로를 대할 때를 포함하여) 어떤 수단이 아닌 목적(end) 그 자체로 대하라."란 말이 있다.


칸트의 사상은 오늘날에는 논란이 있는 부분도 있지만 우리가 어떤 것을 할 때, 신이 보고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남이 나에게 그렇게 대해주기를 바라서 그런 것도 아니라 그냥 '마땅히 그래야 하기 때문에'한다고 말한 것은 어떻게 보면 충격적인 내용이다.

칸트의 정언명령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신이 있든 없든, 남에게 아쉬울 게 있든 없든 바른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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