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종이책을 만들고 싶은 이유
내 작은 소리, <K, orizine>
단 한 번도 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책을 만들고 싶다고도. 글 쓰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나와는 다른 부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기에 책은 내게 늘 소비재였지 생산재였던 적이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회사를 그만두고 가장 처음 저지른 일이 책, 그것도 종이책을 만든 것이었다.
답답했다. 소리를 지르고 싶기도 했다. 모두가 말렸지만, 얼마 안 되는 결혼 적금을 깨서 책을 찍었다. 300권을 찍고 보니 잡지라고 만든 내 첫 책은 서점 매대에 펼쳐져 있는 수많은 잡지들에 비해서 너무도 빈약했다. 양심 상 유통시킬 수가 없었다. 유통시켰어도 안 팔렸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지인들에게 주고 남은 책 250여 권을 내 방 책상 밑에 박스 채 숨겨뒀다.
종이책을 만들고 싶다, 여전히
2015년 7월의 여름날, 다시 종이책을 찍겠다며 벼르고 있다. 그것도 이번엔 시리즈로 낼 생각이다. 벌써 주제도 정했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잘 하는구나, 나......'중국차'에 대해 공부하며 이런 저런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있다. 내 나름의 '차 컬렉션'을 만들 거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차는 알면 알수록 재밌고 또 나랑도 잘 맞는다. (자세한 차 이야기는 일단 패스-)
지금 돌아보니 <K, orizine>을 만들기 전, 정확하게는 초등학생 때부터 쭉 책을 제작해왔다. 수업을 듣건, 책을 읽건 간에 재미있거나 까먹고 싶지 않은 내용은 요리조리 자르고 편집해 책으로 만들었다. 고딕체로 된 워드 파일을 A4용지에 인쇄한 후 반으로 접는다. 스테이플러로 가운데를 찍어 묶어주면 완성이다. 투박하긴 했지만, 그렇게 만든 책들은 낙서를 아무렇게나 해도 되고 심지어 막 찢을 수 있어서 좋았다.
<K, orizine>을 찍고 난 후 6개월 간은 다시는 종이책을 찍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부모님에게 걸리지 않기 위해 감춰둔 <K, orizine>을 볼 때면 더더욱.
혼자 볼 거면 워드 파일을 인쇄해서 보면 될 걸,
왜 나는 굳이 (독립) 출판을 시도했을까?
아름다운 책을 만들어 부디, 너에게 닿을 수 있길
이제는 알겠다. 그 때 나는 (나를) 이해받고 싶었고 또 (다른 이를) 이해하고 싶었다는 것을. 아무도 사보지 않아도 괜찮다고 구시렁대며 책을 찍긴 했지만, 사실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한국(K)에서, 나다운 나(originality)를 지키며 살고 싶다는 의미에서 <K, orizine>을 시작했다. 나처럼 '여긴 어디? 나는 누구?'를 묻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존재해줘서 정말 고맙다고, 각자의 자리에서 따로, 또 같이 저마다의 길들을 찾아보자고.
다음번 책을 만들 때에는 꼭 유통을 시켜야겠다. 한 명 이어도 좋으니 (내게) 아름다운 책을 매개로 누군가와 마음이 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미 시끄러운 세상에 굳이 나까지 소리를 더 할 필요는 없다. 이번엔 글자가 빽빽하지 않은, 책을 통째로 뒤집어 탈탈 털어도 몇 문장 안 떨어지는 책을 만들 생각이다. '별 가구가 없는데도 왠지 앉아서 쉬고 싶은 방' 같은 책, 만들 수 있을까?
덧, 아름다운 책에 관하여
2013 서울 국제도서전의 프로그램 중 하나인 <아름다운 책> 전시의 도록에 나오는 문장들이다. '아름다운 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다양한 대답들이 흥미로워 인용한다.
'아름다운'은 '나름다운'과 비슷한 글 꼴, 소리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나 다운' 것을 아름다운 것이라고 여긴다. 그렇다면 내게 아름다운 책은 '나 다운' 책이리라.
권혁수, 일러스트레이터
아름다움은 공감을 이끌어내는 힘이다. 공감은 내용과 호흡하고 형식과 공명한다. 아름다운 책은 그렇게 우리를 흔들어 놓는다.
임헌우, 북아티스트
책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물체이자 신체이다. 책등은 꼿꼿하게 서 있는 책의 척추이고 표지는 책의 얼굴이고 책의 몸을 감싸는 커버는 책날개라고 부른다. 아름다운 책이란 그 안에 차곡차곡, 또박또박 담긴 활자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와 그 활자들이 새겨진 종이, 그 종이들이 묶인 제본, 그리고 책의 몸까지를 모두 포함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책이 담고 있는 정신 그리고 그 정신이 담긴 형식, 이 두 가지의 완벽한 조화가 책이 가진 아름다움이다.
이영혜, 디자인하우스 대표
비용이든 속도든 양이든, 매체는 정보 전달의 효율성에 따라 진화한다. 종이 책은 가장 효율적이었기 때문에 존속해왔다. 더 나은 매체가 있다면 자리를 내주는 것이 당연하다. 생존은 잔류나 연명이 아니라 일종의 자기반성과 같은 가치의 모색이어야 한다. <거울 속으로>의 저자는 책을, 단정한 방이나 작은 상자, 들판이 보이는 언덕이나 산책길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어느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그 안에서 몇 가지 몸짓을 하거나 짤막한 생각에 잠기는 것이 무에 그리 어려우랴. (......) 책이 쌓여 공간을 차지했다는 것이 지금까지였다면 앞으로는 책 안에 공간이 있을 것이다.
송성재, 북아티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