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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주운전 사고, 겪어보니 뼈아픕니다

살아남아 쓰는 사고 노트

by 잼스

피할 수 없는 외길로 들어서기를 기다렸을까? 시간은 또박또박 그 순간을 향해 가고 있었다. 거듭된 우연, 비현실적인 현실 앞에서 나는 무력했고 잠깐 정신을 잃었다.


별채 수리를 돕고자 연휴에 내려온 아내 덕에 페인트 작업은 수월하게 끝났다. 다만 데크용 나사못의 배송이 지연되고 있었다. 대신 밤과 감을 수확하고, 키 큰 향나무를 다듬고, 화초를 이식했다. 일만 하다 보내기 미안해서 정읍에 가자고 했다. 가까운 오서산에 가려다가 행선지를 바꿨다. 억새에서 구절초로.


우선 참게장정식이 맛있다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꽃축제로 갈 요량이었다. 그런데 얼마 못 가 아내가 휴대전화를 놓고 왔다기에 차를 돌렸다. 예약한 것도 아니고 시간도 넉넉했기에 조급함은 없었다. 교통도 원활해서 고속도로 대신 국도를 타기로 했다. 거리는 비슷하고 시간만 10분 늦춰졌다.


도로공사로 한쪽이 통제된 임시 편도 1차선에 들어섰다. 그때 맞은편 도로에서 그놈이 나타났다. 차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내 앞으로 다가온다. 어디서 본 듯한 장면이다. “어, 뭐야!” 비명 지를 새도, 피할 틈도 없었다. 우두득 소리와 충격! 차 밖으로 어떻게 나왔는지 기억이 없다.


아내가 여러 번 나를 불렀고 난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뭐라 얘기하는데 잘 알아듣질 못하겠다. 보험회사 직원이란다. 대답은 하고 있지만 내용이 분명치 않다. 블랙박스를 달라는 경찰, 구급차에 타라는 119 구급대원을 상대하면서도 나는 잘못이 없음을 입증하려는 마음에 정신없이 사진을 찍어댔다.


지난 일들이 사고 순간과 연결되었다. 나사못이 제때 왔더라면, 일정을 바꾸지 않았다면, 출발을 늦췄다면, 휴대전화를 놓고 오지 않았다면, 그냥 고속도로로 갔다면... ‘만약에 (...)’ 중 어느 하나라도 바뀌었다면 이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연은 신이 익명을 유지하는 방법’이라고 했던가? ‘허, 이런 어쭙잖은 스토리보드에 나를 꿰맞추고 있다니...’



우연을 가장한 필연은 개뿔! 다시 돌아간대도 연결고리 어느 하나 달리 선택하지 않으리라. 이따위 자학적 운명론은 사건에서 가해자를 지운다. 만약도 우연도 없다. 단지 있어선 안 될 원인 하나가 제거되었어야 했다. 음주운전!


경찰, 소방대원, 보험회사 직원에겐 달갑지 않은 출동이었을 것이고, 응급실에서 만난 의사도 피로에 찌든 모습이었다. 사고 차 뒤로 길게 늘어섰던 차량 행렬, 음주운전자를 꺼내주려 나섰던 사람들의 선량한 손길. 오줌을 지린 채 운전석에 앉아있던 그는 수많은 사람에게 끼친 피해를 알기나 할까? 자책은 고사하고 술에 취해 생각나지 않는다 하려나?

출고 후 세상 밖으로 처음 터져 나온 에어백 덕분에 중상은 면했다. 아니 어떤지 잘 모르겠는데 응급실에선 진단을 하지 않는다. 검사와 처치만 한다. 연휴라 병원 대부분이 휴진이었고 우린 어쩔 수 없이 부러지고 멍든 몸으로 여러 장의 X-Ray 사진과 함께 귀가했다. 얄궂게도 우리가 나간 사이 데크용 나사못이 배송되어 대문 앞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아내는 골절된 손가락과 골반 통증을 견뎌내며 진통제를 털어 넣었고, 나는 아픔을 증폭시키는 기침과 하품을 참아야 했다. 잘 모르는 지역 병원 몇 군데를 인터넷으로 뒤져 내일 갈 곳을 정하고 나니 두통과 오한이 찾아왔다. 이른 저녁부터 땀에 젖어 뒤척였고 긴 밤을 보내고 나서야 진단과 입원 수속을 밟을 수 있었다.

음주운전자에 대한 미움이 북받칠 때마다 상한 몸을 잘 추스르는 것이 우선이라는 마음으로 달랬다. 언뜻 보아 큰 부상이 아닌 듯해도 사고 자체는 심각했다. 아내의 손가락 골절은 5주 진단이 나왔지만 “3개월은 지나야 이전의 상태가 될까 말까”라는 의사 소견이다. 둘 다 손목을 다쳤고, 목과 어깨 등 이곳저곳이 쑤셨다. 차는 폐차가 거론될 정도로 부서졌다.


당분간 병원 신세를 져야 한다. 보상을 노린 이른바 ‘나이롱환자’ 시비에 외출은 금지다. 아픈 손으로 씻기 어려워 행색이 말이 아니다. 계절은 기다려주지 않는데 정원과 텃밭을 돌볼 수 없고 집수리도 중단이다. 아내는 성당 봉사 활동과 애써 잡은 강좌를 중도 포기해야 했고, 지인들에게 자신의 빈자리를 채워달라 부탁해야 했다. 우리 부부의 일상도 부서진 것이다.


2022년 국민권익위원회의 설문조사에 국민 100명 중 95명이 음주운전 재발 방지를 위해 ‘차량시동잠금장치’를 설치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거의 모든 국민이 음주운전의 흉포함을 느끼고 있음이다. 차량은 쓰기에 따라 ‘다수살인’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음주자가 잡은 운전대는 칼보다 심각한 무기이며, 운행에는 살인에 대한 미필적 고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차량시동잠금장치’ 부착 의무화는 물론 외국 사례처럼 형량을 법정최고형까지 늘이고, 혈중알코올농도를 0.05% 단위로 세분하여 중벌로 다스림이 옳다. 언제까지 운전자의 각성을 기대하고 처벌의 경중에 대한 논란 속에 알고도 당해야 하는가?


보험처리는 죄책감을 증발시킨다. 사과는 없고 절차만 남는다. 보험 뒤에 숨어 상대방의 불행을 외면하고 경각심을 누그리는 흠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음주운전에 대한 실효적인 법적제재가 보험 본연의 유용성을 되찾는데도 역할을 할 것이다.


연휴가 끝나고 병실에서 더 길고 답답한 연휴가 시작됐다. 사고에 핏자국이 없었으니 그만하길 다행이라는 말도 맞다. 단, 음주운전 가해자에게 다행이어선 안 된다. “내가 너무 야멸차다고? 무슨 소리야, 당신은 나를 죽이려 했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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