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목과 어깨의 통증이 나아지는가 싶더니 허리통증이 생겼다. 교통사고 후유증이란 것이 이런 것이구나 깨닫는다. 시간이 지나 아픈 곳이 드러난다. 막상 아프다고 입원 치료가 모두 가능한 것은 아니다. 골절이나 수술이 필요한 중환자가 아닌 경우 일반병원에서 돌봐주지 않는다.
진료는 의사, 약은 약사, 회복은 혼자. 대부분의 타박상, 찰과상 환자가 그렇다. 갑자기 아픈 사람을 간호할 사람이나 여력이 없기 때문에 교통사고 후유증 환자에게 한의원은 유용한 의료기관이다. 통증 부위에 부항, 침, 주사, 뜸, 물리치료를 반복한다. 파스와 냉찜질로 자가치료도 병행하고 있다.
처음엔 아픈 것뿐만 아니라 씻고 먹고 자는 것, 개인적인 프라이버시 등 여러 가지가 껄끄러웠는데 어느 새 적응해 가고 있다. 창밖엔 코스모스 한창이지만 외출, 면회가 제한되어 좁은 병실과 로비가 답답하다. 다른 병원에 가 본 분들 얘기로는 이곳 여건이 꽤나 좋은 편이란다. 의료진, 시설, 식사 등 여러 면에서 말이다.
보험적용이 되는 4인실 병상인데 환자가 자주 들고 난다. 여럿이 같이 쓰는 병실이다 보니 서로 주의해야 할 것들이 꽤 있다. 때문에 환자 간에 신경전이 오갈 때도 있다. 큰 목소리로 전화를 받거나 TV를 보며 크게 떠드는 사람들이 따가운 시선의 대상이다.
어쩔 수 없는 것도 있다. 열에 아홉은 심하게 코를 곤다. 그래서 이어폰을 끼고 수면안대를 쓴 채로 자고 있다. 온몸에 타박상과 찰과상을 입은 채 며칠 전 입원한 환자도 밤새 심한 코골이와 잠꼬대를 반복했다. “아유, 밤새 잠을 못잤슈.” 흉보는 분 역시 코골이가 심하다. 자는 동안 본인 소리를 못 들으니 제 허물이 보이지 않아 생기는 코미디다.
횡단보도에서 SUV차량에 치인 분, 신호를 어긴 차량과 충돌한 오토바이 운전자, 뒤에서 달려든 차에 받혀 할머니, 딸, 손자 3대가 같이 입원한 분들도 있다. 팔십 넘은 할머니는 지팡이 짚고 화장실 가는 게 힘들어 물을 조금만 마신다니 맘이 짠하다. 모두 이만하기 다행이라 말한다. 당한 사람이 참 너그럽기도 하다.
맞은편 20대 환자는 가끔 회사에서 온 전화를 긴장하며 받는다. 자신이 근무하는 병원 치료가 부족하다 느껴 이곳에 온 간호사 환자도 있다. 이분도 직장생활 때문에 충분히 쉬지 못하고 퇴원했다. 나 같은 은퇴자나 허용된 치료 일수를 채울 수 있다니 이것이 감사해야 할 일인가 싶다.
언뜻 멀쩡해 보이지만 여기저기 멍들고 쑤신 사람들이다. 불의의 사고를 겪고 심적으로 위축되어 있다. 생존본능이 극한에 달했던 터라 불안감이 채 가시지 않았으리라. 시간이 지나면 아물긴 하겠지만 아무리 의료기술이 나아졌다 해도 원상태로 돌려놓지는 못한다.
힘든 사람들을 많이 상대해야 하는 간호사의 배려심도 의료 처치에만 그치지 않는다. 매일 다양한 환자들의 하소연과 불만을 들어주어야 하고 당직근무도 해야 한다. 그렇다고 입원실 사람들이 모두 축 처져있는 것은 아니다. 힘들어 보여도 넌지시 인사를 건네면 금세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잠깐이나마 본모습을 찾는다. 그러니 인사만큼 마음에 좋은 약이 없지 싶다.
청소하는 아주머니도 그렇다. 올해 일흔이라는데 “힘드시겠다. 쉬엄쉬엄 하시라” 말씀드렸더니 주변에 같은 일을 하시는 분 중에 당신이 가장 젊다며 목소리에 활기를 싣는다. 젊어 보이려 안달하는 노인들이 넘쳐나는 요즘, 만족스럽게 늙어가는 노년이 보기 좋다. 그래선지 내 주변은 전보다 더 깨끗해 보인다.
딸에게나 쬐인다는 가을볕이 좋아서 잠시 병원 밖으로 나가 해바라기를 해본다. 예전엔 병원 밖에 환자복으로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눈에 좀 거슬렸다. 실제로 병원 밖 환자복 차림을 자제하는 권고안이 대한병원협회와 보건복지부에서 나오기도 했다. 내가 환자가 되어 겪어보니 좀 더 현실적인 방안이 필요한 것 같다.
사람이 서로 다른 것이 지문만은 아니다. 선 자리가 다르면 삶도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다. 사고를 겪어보니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애쓰는 것이 새들하다. 상대의 위치에서 시선을 맞추는 태도를 그동안 잊고 산 것은 아닌가 돌이켜 본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