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연히 의욕 넘치는 날이 있다. 혼자 있어서 참견하고 간섭하는 사람이 없다는 게 이럴 땐 화근일 수도 있다. 전부터 주방 문 색깔이 칙칙해 보였는데 갑자기 바꾸고픈 충동이 일었다. 이런 심정에 맞장구치듯 창고에 쓰고 남은 흰색 페인트가 떠올랐다.
네 개의 미닫이 문짝을 떼어내 마당에 늘어놓았다. 유리가 끼워진 격자문이다. 조심조심 젯소를 바르고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페인트로 덧칠하고 볕에 말렸다. 하루가 꼬박 걸렸다. 해 떨어진 후 낑낑대며 제자리에 끼워보니 뭔가 이상하다. 광택이 없다.
아차 싶었다. 여기저기 뒤져보니 ‘이런 멍청이!’, 문틀에 바르는 페인트가 따로 있을 줄이야. 무턱대고 칠하느라 애만 썼다. 처음부터 다시! 두 번 일하는 것은 두 배의 두 배로 힘이 든다. ‘왜 그딴 생각을 했을까’부터 ‘사서 고생한다’에 이르기까지 맘속으로 징징대며 일을 끝냈다.
엉터리 페인터지만 내친김에 철대문까지 칠했다. 물론 여기엔 유성 페인트로. 처음엔 간단한 작업으로 생각했지만 이내 온몸이 쑤시고 결렸다. 창살과 요철 무늬가 있어 작업이 쉽지 않았다. 페인트도 모자라 추가로 주문했다.
지나는 동네 할머니들이 ‘아유, 훤해졌네’하며 토닥거려 주지 않았으면 붓을 던질 뻔했다. 관심과 칭찬에 일할 맛을 되찾고 여러 날 걸려 페인팅을 마쳤다. 해놓고 나니 대문도 주방도 깔끔하다. 광택이 살아있고 먼지도 미끄러질 듯하다.
나는 내가 몸치인 줄 알고 살아왔다. 춤이 아니라 몸 쓰는 노동 말이다. 못 질 하나 제대로 못하는 내가 창피했다. 한때 못질은 가장의 척도였다. 수완 없는 몸뚱이에 남들의 군말이라도 꽂히면 더 의기소침해졌다. 차츰 회피하는 일이 잦아지고 ‘아, 나는 이런 일에 맞지 않나 보다’하며 멀리했다.
일머리가 없는 건 맞다. 일하기도 싫어한다. 그런데 찬찬히 해보면 즐겁다. 내 능력에 맞는 속도가 있다. 이제껏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 그걸 외면했다. 인생의 방향만큼 속도도 중요하다. 늦추어 만족스러우면 따라서 삶의 질도 향상된다. 선택의 문제다.
‘일 못하는 놈이 쟁기 나무란다’고 그동안 이런저런 장비를 사 모았다. 예초기, 절단기, 원형톱, 잔디깎이, 송풍기, 체인톱, 충전전지가위, 고지가위 등등. 사실 나로선 평생 처음 써보는 것들이라 서먹서먹한 느낌이 사라지기까지 오래 걸렸다.
특히 기름으로 작동하는 엔진식 장비는 망가뜨리기도 하고 매번 작동 순서가 헷갈리곤 한다. 역시 친숙해지는 데엔 시간이 필요했고 서두름은 외려 방해가 됐다. 이제 엔진의 떨림이 내 등과 팔뚝에 전해져 오면 잘린 풀과 함께 몸치 콤플렉스도 날려버린다.
어느덧 수확 철이다. 애초에 텃밭의 시간엔 급한 사정이 없다. 요즘엔 양파를 말리고, 감자를 캐고, 상추가 매 끼니 밥상에 놓인다. 호박과 오이, 토마토가 주렁주렁 달리고 완두콩, 옥수수, 당근, 양배추, 고추 모두 안녕하다. 곡절은 있지만 그렇게 또박또박 간다.
저들은 모르겠지만 세상에 나오지 못한 씨앗과 제대로 자라지 못한 모종이 있었고, 흙을 뒤집어 양분을 준비하는 시간이 있었다. 풀을 매고 줄을 치고 지지대를 세웠다. 가지와 곁순을 치며 눈을 맞추고, 물을 줄 때도 다정히 흩뿌려 주었다. 느린 손길은 가장 빠른 소통의 속도였다.
덕분에 손이 거칠어졌다. 나는 이렇게 만들어진 내 손바닥의 굳은살을 사랑한다. 운동도, 생계도 아닌 삶의 기쁨을 위해 만들어진 딴딴한 살을 사랑한다. 수족처럼 부려진 농기구, 연장과 직접 맞닿아 만들어진 ‘사서 고생’의 결정체를 사랑한다.
굳은살은 금세 돋아나지 않는다. 더 오래 즐겁기 위해 조금씩, 천천히, 잊지 말고 꾸준히, 내 삶의 속도에 맞춰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