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 열매로 넉넉한 계절이지만...
유월은 하루하루가 선물이었다. 덕분에 살림이 폈다. 흰 밥 위 연둣빛 완두, 매 끼니 다채로운 쌈채소, 다양한 메뉴를 조리할 수 있게 해 준 채소와 가미 없이 황홀한 맛을 보여준 과일들... 모든 것이 흙에서 왔다.
보리수. 석가모니의 보리수도, 슈베르트의 보리수도 아니다. 그냥 뜰보리수다. 글과 음악이 아니라 혀로 쓸모를 느끼는 보리똥나무에 빨간 맛이 주렁주렁하다. 입안에서 터진 과즙은 금세 머릿속을 깨우고 땡볕으로 지친 몸에 생기를 혈액처럼 퍼뜨린다. 아스파라긴산 덕분이다.
블루베리. 놀랍게도 진달래과 식물이다. 왕관을 쓴 슈퍼 푸드는 익을수록 진한 빛깔, 농익은 단맛이 감돈다. 대체로 노화는 눈부터 오는데 남보랏빛 안토시아닌은 망막염과 백내장을 막아 준다. 특히 나 같은 당뇨 환자라면 생으로 한 움큼씩 우적우적 씹는 호사를 부러워할 듯하다.
양파. 가을걷이 한 자리에 툭툭 심은 모종이 겨울을 견뎌내고 알배기가 됐다. 암놈은 눕고 수놈은 뻣뻣이 줄기를 세우는 것도 신기하다. 햇볕에 잘 말려 망에 담아 바람 잘 드는 곳에 둔다. 주홍빛 껍질이 햇살 받아 곱다.
감자. 바싹 말린 두둑에 줄기가 흐느적거린다. 수확의 신호다. 원하는 대로 끄덩이를 잡아당기면 덩이줄기가 딸려 온다. 행여 생채기가 날세라 조심스레 흙을 뒤집는다. 심장보다 굵은 감자가 나오면 가슴도 두근거린다.
애호박은 밤이슬 맞고 크는지 자고 나면 훌쩍 커 있다. 오이도 그렇다. 어느새 까치발 한 손끝이 못 미친다. 매끈한 열매는 투박한 이파리완 다르게 영락없는 아기 살갗이다. 까칠한 오이, 어깨를 내민 당근, 날렵한 고추도 제철로 가고 있다.
음식을 만든다. 국수를 삶고 매실청 비빔장을 얹은 다음, 채 썬 오이와 골뱅이 고명을 앉힌다. 멸치 우린 물에 된장을 풀고 애호박과 감자, 양파, 당근을 적당히 썰어 넣어 뭉근하게 끓인다. 된장찌개의 마무리는 잘게 썬 청양고추 한 개다. 새우젓을 넣고 들기름에 볶아 만든 호박볶음, 달걀물을 입혀 부친 호박전에 막걸리 한 사발. 단번에 들이켜지 않을 수 없다.
엄청난 행운을 자축한다. 흙은 제철 열매를 듬뿍 안겨주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얼마 되지 않는 지구상의 흙, 인류가 골고루 나눈다면 기껏해야 화분에 담긴 한 줌 정도가 내 몫이 될까? 그걸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토양 1센티미터가 생성되는 데 평균 200여 년이 소요되고, 30센티미터가 쌓이려면 1천~1만 년에 달하는 세월이 흘러야 한다고 한다. 단단한 암석이 풍화작용을 거치면서 유기물과 물, 공기가 섞여 흙이 되는데, 사람으로 따지면 표피보다 더 얇은 땅거죽이 식물에 영양을 공급하여 자라게 한다.
어디 식물뿐이랴. 땅속 동물과 곤충, 미생물 등 다양한 생물에게 서식처를 제공하고 오염 물질과 사체를 정화한다. 물과 각종 원소를 저장하여 생명체에 에너지를 제공함으로써 생태계가 지속적으로 유지된다. 이 겉흙이 있어 지구는 생명을 품은 아름다운 별이 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현재의 토양 침식 및 퇴화가 지속되면 겉흙을 이용할 수 있는 기간이 약 60년 밖에 남지 않는다고 경고한다. 울릉도의 2배에 해당하는 토지가 매일 척박한 땅으로 바뀌고 있다. 1년 동안 사막화로 없어지는 땅은 남한 면적의 60%에 해당한다.
사실 한 줌 흙조차 갖지 않으려는 사람이 태반이다. 남극이나 북부 툰드라의 얘기가 아니다. 하루 종일 흙 한 번 밟지 않고 살며, 서류상으로만 땅을 가진 사람들이 땅땅거리며 살아가는 세상이다. 어쩌다 보니 땅은 돈으로 매겨지고 맨땅은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감춰야 편리하다.
이제 장마가 시작됐다. 흙을 만지며 살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도 때마다 느끼는 불안감을 감출 수 없다. 한 방울 물기도 스며들 틈 없는 개발로 ‘땅 아닌 땅’ 아래 갇힌 흙, 그 고통과 비명이 또 어떤 참사를 가져오진 않을지 벌써부터 두렵다.
<참고 : WATV ‘지구의 살갗, 흙’ ">https://watv.org/ko/bible_word/earths-sk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