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속았네요. 여기, 식물을 좋아하지만 잘 키우지는 못하는 ‘식물 초보’가 있습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씨앗을 심고 몇 날 며칠을 들여다보며 싹트길 기다립니다. 지쳐 갈 때쯤 이끼만 가득한 화분을 보며 탓을 합니다. 나를 속인 건 씨앗인지, 씨앗을 판 사람인지, ‘똥손’의 주인인지?
원망은 부질없죠. 그래요. 바로 제 얘깁니다. 한때 욕망덩어리였던, '식물 킬러'요. 뭐, 저 같은 사람이 있어야 종묘사도 먹고사는 거 아니겠냐고 지질한 위로를 하기도 했죠. 일찍이 부처님도 “사랑하는 꽃은 보지 못해 괴롭고, 잡초는 자주 봐서 괴롭다.”라고 했습니다.
꽃은 고양이입니다. 계절의 향기와 생기를 품고 있지만 사랑해 달라고 매달리지는 않죠. 다채로운 모습만큼이나 개성이 강하고 수발들어야 할 일은 많습니다. 식물마다 요구사항도 제각각입니다. 그렇게 어려운 꽃이 많습니다. 까다롭고 이름도 기억하기 힘든 꽃들 말이죠.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제 좀 겪어봤다고 엄살떠는 게 아녜요. 알면 알수록 복잡하고 어려워집니다. 키 높이, 꽃피는 시기는 물론‘광발아’니,‘암발아’니, ‘적산온도’처럼 공부할 것도 많습니다. 어떤 식물용어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쓰던 거라서 피곤합니다.
그래서 위대한 정원사들에게 조언을 청했습니다. “네 땅을 알라.” 거장들의 말은 한결같습니다. 토양과 기후에 맞는 식물을 가꾸라는 거죠. 아무리 인생 자체가 배움이라지만, 육십이 넘도록 나 자신도 모르는데 대화도 안 되는 흙을, 기상청도 매번 틀리는 날씨를 어찌 알아보란 얘긴지요?
생각을 바꿨습니다. 그리고 눈을 돌려 지금 자라고 있는 식물을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보고 싶은 꽃이 아니라 이 뜰에서 탈 없이 잘 자라는 꽃, 일 년 열두 달 싹 틔우기부터 겨울나기까지 손이 덜 가는 꽃을 키우기로요.
물 주기, 거름 주기, 잡초제거, 가지치기. 뜰에서 제가 주로 하는 일입니다. 아, 해충 방제랑 겨울나기 준비도 있군요. 그중에도 물 주는 일은 가장 빈번하고 번거로운 일이랄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풀꽃보다 나무, 일 년생 보다 다년생, 씨앗보다는 뿌리로 번식하는 식물이 나를 편하게 해 줍니다.
샐릭스, 홍가시, 단풍처럼 잎이 아름다운 나무가 그렇죠. 매화, 등나무, 찔레, 인동초, 목서처럼 향기로운 꽃나무들도 가뭄에 잘 견딥니다. 죽단화, 철쭉은 모진 환경에도 잘 자라고 쑥부쟁이, 꽃범의 꼬리, 삼엽국, 자주달개비는 뿌리로 번식하며 건조한 땅이나 그늘에서도 잘 버티더군요.
매년 같은 자리에서 피어나는 금어초, 아스파라거스, 루드베키아, 샤스타데이지는 다년생입니다. 수선화, 작약, 나리, 백합, 상사화, 모나르다도 그렇고요. 겨울나기 걱정 없는 세덤, 백리향, 꽃잔디, 송엽국, 패랭이는 땅 위에 낮게 번져서 잡풀을 억제하고 꽃도 오래갑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앞집 오래된 호두나무에 이파리가 하나도 없는 걸 발견했습니다. 돌연사라네요. 작년까지 호두를 주렁주렁 달아맸던, 우리 마당엔 없어서 부러워했던 나무가 빈가지로 서있는 모습이 너무나 처연하게 느껴졌습니다.
씨앗에도 영혼이 있으면 어쩌나 싶습니다. 실패만큼 좋은 스승은 없다지만 키우다가 죽으면 마음이 언짢아요. 그 무엇이든 생명이 깃든 건, 태어나지 못하거나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기 어렵습니다. 쉬운 꽃이라고 쉽게 보면 안 되는 이유를 잠시 잊고 있었네요. 하루라도 오래 보려면 내 번거로움이 즐거워져야겠죠?
그 마음으로 새로운 꽃씨를 심었습니다. 해바라기, 금관화, 밥티시아, 큐피드다트... 부들거리는 손으로 모종판에 옮기며 내 땅에서 잘 살아주길 빌었습니다. "싹이 나올까? 꽃이 필까? 겨울은 잘 견딜까?" 하는, 그저 이런 잔잔한 고민이 행복임을 느끼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