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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텃새와 어울리는 법

by 잼스

한 번쯤은 새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뜰에서 자주 마주치는 것이 식물 말고는 벌레와 새니까요. 거의 같이 산다고 봐야죠. 하지만 모습과 소리, 이름 그 어느 것도 잘 모르는 게 태반입니다. 벌레처럼 느리지도, 식물처럼 제자리를 지키는 것도 아니라서 가까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유쾌하지 않은 경험도 무관심에 한몫했습니다.


특별한 성대를 가진 두 종류의 새가 있습니다. 바로 까마귀와 물까치인데요. 둘 다 다른 새들에 비해 눈에 띕니다. 작은 새들은 짹짹거리거나 지저귀지만, 몸집도 목청도 큰 까마귀는 내 귀에 대고 고함을 칩니다. 때론 베이스 톤으로 혼잣말처럼 주절거리기도 하는데 얼핏 사람 목소리처럼 들려 깜짝깜짝 놀라기도 해요.


까마귀보다는 작지만 물까치도 다른 새들에 비해 다부진 체구를 가졌습니다. 몸길이가 30cm는 훌쩍 넘고, 매끈한 몸매에 등 아래쪽의 날개와 꼬리는 엷은 청색으로 수려한 외양을 뽐냅니다. 여러 마리가 몰려다니며 서로를 부르는데, 태엽 감는 소리 같다고 할까요? 겉모습과 생판 다른 목소리에 헉하고 맙니다.


까마귀 / 물까치

말투에서 느꼈겠지만 저는 이 둘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단풍나무 위에 지은 물까치 집을 털어냈습니다. 이맘때가 산란철이죠. 이 녀석에게 호되게 당한 뒤론 가급적 새집을 완성하기 전에 치워버립니다. 재작년, 같은 나무에서 부화한 새끼들의 요란한 목소리를 우연히 들었던 그날엔 신기하고 반가운 마음이 컸었지만 말입니다.


새끼들이 생기자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주변 10미터 내에 얼쩡거리는 걸 두고 보지 못합니다. 내 머리 위로 갑자기 날아와 공격하는데 기겁했죠. 오래된 공포영화 <새>가 떠오르기도 하고요. 나중에야 물까치의 습성을 알게 됐는데, 문제는 단풍나무가 현관 앞에 있다는 거였습니다. 마당에 나갈 수 없으니 새끼가 둥지를 떠날 때까지 보름 동안 제대로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는 물까치의 이런 행동을 부모의 자식 사랑에 빗대 칭송하더군요. 한번 당해보면 그런 말이 쏙 들어갈 겁니다. 다른 새들도 여기저기에 둥지를 틀고 새끼를 까는데 이처럼 유난하게 구는 녀석은 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타고난 성정이 그런 거죠. 물까치의 잘못은 아닙니다. 목소리도 타고 난 걸 어쩌겠어요? 이런 식으로 적당히 거리를 둘 수밖에요.


헐린 둥지의 겉은 흙과 지푸라기, 나일론 끈과 나뭇가지 등으로, 속은 솜과 이끼로 만들어졌습니다. 겉은 탄탄하고 속은 폭신한 보금자리를 보고 나니 견고한 설계와 건축 기술은 어떻게 배웠고, 얼마나 오고 가며 재료를 나른 것인지, 더구나 어떻게 부리만으로 만들 수 있는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새는 우리의 머리 위를 나는 존재임을 잊고 살았습니다.

호랑지빠귀 둥지 속 알, 헐린 물까치 집, 쇠딱따구리, 죽단화 속 새집

해 지고 어둠이 찾아오면 작든 크든 시끄럽게 떠들던 녀석들은 자취를 감춥니다. 신기하게도 어둠에 어울리는 차분한 소리만 남습니다. 긴 호흡으로 새카만 밤을 가르며 ‘나 여기 있어요’ 노래 부르는 고독한 존재들이 있습니다. 길게 휘파람을 부는 호랑지빠귀, 세 마디로 똑똑 끊어 노래하는 소쩍새, 네 음계로 나지막하게 노래하는 검은등뻐꾸기, 끙끙 앓는 소리의 멧비둘기...


그리고 다시 날 밝은 기미가 보이면 베갯머리에서 재잘대는 애들처럼 지저귑니다. 꾀꼬리는 '나 찾아봐라'하는 듯 노래하고요. 이름 모를 새들이 하나 둘 깨어나는데 제가 지켜본 바로는 일찍 일어난 새는 벌레 잡기보다 노래하기에 바쁩니다.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게 우선인 듯합니다. 그렇게 생명의 소리가 마당에 가득 차면 비로소 아침이 시작됩니다.


새소리에 조금씩 귀 기울이니 시골 생활에 인연이 부쩍 느는 것 같아 즐겁습니다. 어떤 새들은 눈 밑에 사는 내가 마뜩지 않다고 까칠하게 떠들기도 하겠죠. 나는 나대로 소리가 어쩌니 저쩌니 하며 살고요. 너무 시끄러우면 필시 근처에 고양이가 있겠구나 하며 익숙한 듯 무심해질 때, 나도 시골 사람이 다 되었다고 할 수 있으려나요?


시골 텃새와 어울리는 법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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