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내 눈을 의심합니다. 세상을, 사물을 제대로 보고 사는 것인지. 두 눈이 믿을만하다면 이처럼 자주 틀린 답을 적어내진 않을 텐데 말이죠. 매일 마당을 순례하지만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돌아서는 경우가 많아서 말입니다.
텃밭 채소에 입맛을 다시면서도 바로 옆에 유채가 쓰러져 백합을 덮친 건 알아채지 못합니다. 쓰러진 아스파라거스를 일으켜 세우지만 머리 위 복사나무가 어떻게 변했는지는 모르고 지나칩니다.
지난봄 매화 향기 아련한 기억은 꽃이 지자 금세 사라졌습니다. 수사해당화, 으름, 다래꽃에 눈을 돌렸고 제 차례를 기다린 다른 식물에 신경 쓰느라 하얗게 잊었죠. 그러다가 얼핏 연둣빛 앙증맞은 열매를 발견했습니다. 매화나무가 매실나무로 바뀌는 순간, 다시 두 눈에서 하트가 뚝뚝 떨어집니다.
참 야속하죠? 꽃을 맺지 않으면, 당장에 쓸모를 느끼지 못하면 잊힌다는 사실 말이에요. 사람만 그런 게 아니라 곤충과 벌레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눈은 마음의 창이라잖아요? 자신에게 소용이 되는 것에 관심과 애정을 쏟는 거죠.
그런데 꼭 그것만은 아녜요. 순식간에 마당이 바뀌었다니까요? 뜰보리수, 층층나무, 아니 나무란 나무는 모두 가지를 쭉 뻗고 이파리를 버글버글 펼쳤습니다. 울창한 숲이 된 거죠. 머리에 이고 선 하늘이 지난 계절에 비해 두세 배는 늘었습니다. 지붕보다 높게요. 그러니 눈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변명이 아닙니다. 할 일이 많아지기도 했어요. 괭이밥과 개망초는 아무리 타일러도 잔디마당에 퍼질러 눕기 일쑤고, 배불뚝이 철쭉은 지나다닐 수 없을 만큼 웃자랐고, 미국쥐손이는 뒷마당에 아예 솜이불을 깔았습니다. 애정이 식은 게 아니라 그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뜨거워질 새가 없는 겁니다.
괜찮습니다. 설사 눈이 가 닿지 않더라도, 너무 할 일이 많아서 깜박 잊더라도, 외면하지만 않는다면 말이죠. 잠깐 동안 피고 지는 골담초를 보지 못하거나, 비뚤게 다듬은 회양목이 저 스스로 이파리를 채워가는 모습을 놓칠 리 없습니다. 겨우내 텅 비었던 마당이 어느새 풀꽃들로 채워져 새삼 놀랍기는 하겠죠.
제가 비록 춥고 비가 와서 쉬고, 덥고 해가 뜨거워서 놀지만, 시선까지 거두진 않습니다. 인동초가 포도나무를 칭칭 감아버리고, 사위질빵이 에키네시아 목을 조르고, 찔레가 고개를 땅에 처박으며, 배풍등의 등살에 까마귀밥이 초주검인데 어떻게 모른 체할 수 있겠어요?
죽단화 무리에 주눅 든 홍가시나무를 구해내고, 불두화와 치자나무 사이에서 허우적대던 낙상홍의 손짓을 발견합니다. 말발도리가 꽃 틔운 걸 반기고, 섬잣나무에 삐죽한 새순을 언제쯤 집어줄지 곰곰이 손을 꼽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쯤에서 실토해야겠습니다. 너저분한 공치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 눈은 믿음직스럽지 못합니다. 잡초임을 알게 되면 함부로 대하고, 꽃이 지고 나면 아름다움을 눈여겨보지 않곤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 어떤 풀꽃과 나무를 편애하기도 하고요.
다행히 뜰을 가꾸며 눈뜨게 된 건 이런 겁니다. 꽃 핀 시간보다 지고 난 후의 기간이 훨씬 길다는 것, 아름다움이나 쓸모라는 차등은 식물이 정한 기준이 아니라는 것, 마당은 몇몇 식물만의 세상이 아니라서 공존이 자연스럽다는 사실. 신록의 계절입니다. 마음의 창을 좀 더 활짝 열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