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더워서 아무것도 하기 싫네요. 햇볕을 피해서 꼼지락거리지만 금세 지칩니다. 지친 몸은 먹는 것조차 노동이라 느끼는 것 같아요. 만사 귀찮아져선 주방 앞에서 서성거리기만 합니다. 이럴 때 상추에 쌈장을 척 얹어 씹으면 입맛이 돌아올 것도 같은데, 어느덧 텃밭 채소는 쇠 가고 있습니다.
상추는 노란 꽃을 피우고 그 옆에서 자라는 치커리는 보랏빛 꽃을, 고수는 흰 꽃을 피웁니다. 먹을 것이라는 콩깍지가 씌어서 그렇지, 꽃밭에서 만났으면 몰라봤을 겁니다. 보통은 꽃 피고 열매 맺는 시기를 식물의 가장 활동적인 절정기라고 여기잖아요? 그런데 꽃핀 상추는 한물간 채소입니다.
뿌리를 내리고 줄기와 잎을 내는 동안엔 성장이 삶의 의미였고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는데, 긴 시간 햇살과 바람, 비를 온몸으로 맞고 나니 자신을, 자신의 삶을 지키는 게 간단치 않게 되었습니다. 언제 뽑혀 나가게 될지 모르는 처지죠.
하지만 내 눈엔 상추의 전성기가 이제부터 아닌가 싶어요. 사람의 기준에서는 잎이 작고 뻣뻣해져 채소로써의 쓸모는 없어졌을지 몰라도 이제야 홀가분하게 대를 높이고 꽃을 피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보이는 족족 이파리를 뜯기던 고난의 시기를 용케 넘긴 거죠. 비로소 채소 딱지가 떨어졌습니다.
이젠 더 이상 잎상추니 결구상추니 하는 출신도, 유기농이냐 무농약이냐 하는 배경도 따지지 않습니다. 날 때부터 정해진 쓸모 때문에 생의 목표가 어긋나 있던 '잎'채소는 드디어 생산성이나 효용성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은퇴하고 나이 들면서 조금씩 느슨해진 삶이 고맙게 느껴집니다. 자신을 지키는 힘은 약해졌지만 주위를 둘러보는 눈은 밝아졌습니다. 늙어 간다는 건 그래서 좋은 듯해요. 보이지 않던 것, 무심코 지나쳐 온 것, 사소하게 여겼던 걸 달리 되새김질해 볼 수 있으니 말이죠.
상추 꽃대는 그리 아름답지 않습니다. 마디지고 휘어지기도 합니다. 밑동에서 뜯겨나간 이파리 때문이죠. 상추도 나도 겉으로 보기에는 생산성이나 활력이 예전 같지 않다고 여겨질 수 있지만, 타인의 기대와 사회적인 책임을 덜어낸 지금에야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시간과 공간을 찾은 게 아닐까요?
삶의 어떤 단계를 '전성기'라고 정의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가치관도 달라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생산적이고 활발한 시기도 중요하지만, 누릴 수 없었던 '홀가분함'과 욕심을 내려놓은 생활이 진짜 삶일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발견한 평화로움과 충만함이 더욱 값진 절정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노쇠한 상추에 물을 줍니다. 꽃피고 시들 때까지 말라죽지 않도록 물을 주려 합니다. 이제야 주어진 자신의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는데 그 찬란한 시기를 놓치게 하고 싶지 않아요. 비라도 내리면 더욱 좋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