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난 잘 지내고 있어. 늘 형이 걱정해 주는 시골살이, 잘하고 있다고 이렇게 소식을 전하네.
한동안 폭염이 윽박지르고 난 뒤라 한밤에 선선한 바람이 달갑네. 실려 오는 풀벌레 소리가 간지러운 지금은 고독의 시간이야. 어느 집 마당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나도 금세 온 마을에 번져나가지만, 내가 좋아하는 음악은 크게 들어도 마당을 벗어나지 않는 신비의 세계에서, 그동안 잊고 살았던 세사르 바예호(César Vallejo)의 시집도 펼치게 됐고.
그러다가 모든 소리가 딱 끊어지는 새벽이 와. 나는 까맣게 물든 채 끝없는 어둠의 밑바닥으로 서서히 잠기게 되는데, 숨을 쉴 수 있는 게 신기할 정도야. 그리곤 여명 속에 사물이 희끄무레 제 모습을 드러내는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마중하지. 덥든 춥든 세상이 서서히 밝아오는 이 시간은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때론 놓치지 않으려 잠을 쫓아낼 때도 있어.
이윽고 산을 넘어온 밝은 햇살이 ‘쏴아’하고 마당으로 쏟아지면 세상의 색깔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아침인 거야. 어딘가 숨어있거나 갇혀있던 구름도 벅찬 모양으로 풀려나지. 높게 자란 나무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구름도 좋지만, 역시 가림막 없는 하늘에 거침없이 훅 치고 들어오는 구름을 보았을 때, ‘아, 여기가 시골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쫓아 올라가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야.
하지만 한낮의 태양은 여전히 똑바로 쳐다보기 힘들어. 밖으로 나서려면 각오하고 크게 숨을 들이마셔야 돼. 집 안도 덥긴 마찬가지지. 한동안 집 전체를 방열판으로 씌우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봤어. 더 성가신 건 '벼룩파리'야. 그늘에 앉아 한숨 쉬려면 여지없이 눈으로 달려들지. 그래도 피를 빨진 않으니 모기보단 낫다고 해야 하나?
어느덧 텃밭도 시들해졌어. 오이도 호박도 잎이 누렇게 떴고, 내 맘도 첫 열매가 달리던 때에 비하면 시큰둥하지. 시골생활에 익숙해져 갈수록 예상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지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만큼 고마움이 옅어지고 있어. 믿음이 가져온 변심이지. 그럼에도 가을무와 쪽파를 어디에 심을까 떠올리는 걸 보면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인 게 맞나 봐.
잔디를 깎고 뒤뜰에 무성한 풀을 예초기로 베고 나면 한숨 돌리게 돼. 갑자기 ‘정리 정돈은 사람의 본성일까?’하는 생각을 해봤어. 정원을 가꾼다는 게 결국 정리 정돈이더라고. 애초에 아이의 마음엔 그런 게 없을 텐데 왜 나는 후련함을 느끼는 건지. 빨래와 설거지도 마찬가지야. 잘 교육받은 덕분일까? 모르겠어. 먹고살려는 본성 때문인지, ‘문명을 위하여’라는 교육 효과인지 말이야.
중천에 있을 땐 잘 모르지만 해가 지는 건 정말 빠르기도 하지? 서산이 있어서 그런가 봐. 가야 할 곳이 정해져서 말이야. 잘 알고 있겠지만 석양에 물든 하늘을 보는 것도 흔치 않아서 황홀함이 두려워질 때가 있어. 붉게 젖은 노을이 내일은 없다고 할까 봐서. 기후 변화가 여간해야 말이지. 어쨌든 한여름 노동엔 딱 좋은 시간이야. 사과나무를 심듯 일을 해야겠지? 아까부터 붉어진 고추가 기다리고 있네.
평범한 일상이라는 게 있기나 할까? 찬란한 인생이라는 것도 말이야. 우리가 '꽃'을 그릴 수는 없잖아? 지금 마당에 능소화 뚝뚝 떨어지고, 백일홍 폭죽에, 아이스크림콘 같은 수국이 만발한데, 꽃이라 불리긴 해도 그 어느 하나가 꽃 전체는 아니니까. 마음도 마찬가지. 의견이야 있을 수 있겠지만 또 없는 것과 마찬가지겠지. 누구에게나 나의 생활, 나의 삶은 각기 도드라진 꽃이 아니겠어?
아침저녁 선선해지니 이제 좀 살만한가 봐. 이런 얘기도 다 하는 걸 보면 말이야. 누구보다 도시를 떠나서 살고 싶어 했지만, 망설이고 있는 형에게 걱정 내려놓으라고 하는 얘기야. 그렇다고 내 옆으로 오라는 소리는 아니야. 지금의 고독이 무너질까 걱정스러워. 진심이야. 귀가 간지러운 걸 보니 “얼마나 오래 가나 보자”하는 말이 들리는 것 같네?
혼자 지내는 걸 안쓰럽게 바라보는 걸 알아. 하지만 다툼도, 중요한 결정도, 무엇보다 ‘말’이 필요 없는 지금의 생활이 만족스러워. 꽃과 나무, 바람과 하늘, 좋아하는 음악은 내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지루함의 고마움이랄까? 사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관심이나 가졌을까 싶기도 해.
사는 게 평범하지 않다고? 지나는 길이면 들러서 차 한 잔 하고 가. 혹시라도 시골 생활에 큰 기대는 하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