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겨울

Lake Louise,Albinoni, Castelli di Scozia

by 잼스

김 서린 창 밖으로 어둠이 짙다. 올 들어 두 번째 내리는 눈은 노란 가로등 불 빛 아래서 바람에 멱살을 잡힌 채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다. 뭔가 단단히 잘못을 한 모양이다. 내일 새벽, 올 들어 최강의 한파가 온다고 일기예보에선 호들갑이다. 올 들어 최강이란 말은 언제든 이만한 추위가 또 올 수 있다는 얘기다. 덕분에 나는 추위를 핑계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빈둥거렸다.


시골에 혼자 있다 보면 선율 하나, 장면 하나에도 멍해지는 순간이 자주 온다. 찰나의 황홀함이랄까? 저 산이, 저 나무가 저런 모습이었구나 하던 차에 비밀처럼 뭉게뭉게 게으름을 피우게 하는 음악도 연달아 들려온다. <Yuhki Kuramoto>의 <Lake Louise>, <Ennio Morricone>의 <Castelli di Scozia>, <Remo Giazotto>의 <Albinoni: Adagio-for organ & strings>...


그래도 뭉기적거리며 선룸에 널어놓은 무말랭이와 가지 말린 것을 거둬들이고 채반을 씻어 말린다. 무위도식을 죄악시한 소년 시절의 교육이 뼛속 깊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선룸에는 추위를 이기지 못하는 천리향 형제와 호야, 제라늄과 키 작은 동백들이 들어와 있다. 특히 천리향으로 잘 알려진 서향(瑞香)은 올망졸망 피어난 꽃에서 그윽한 향내가 올라오고 있어 한번 더 들여다보게 된다. 상업적인 목적으로 유통업자들이 이름 지은 천리향의 본래 명칭은 '서향(瑞香)'이다. 옛날 어느 스님이 잠결에 맡은 기분 좋은 향기를 찾아 나섰다가 발견했다 하여 잘 수(睡). 향기 향(香)을 써 수향이라 이름 붙였고, 이후 상서로운 향기를 풍긴다고 하여 서향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20221214_090723.jpg 그래서 꽃말은 '꿈속의 사랑'이라고 한다


재스민 삼 형제는 아예 거실에서 자라고 있다. 월동 온도가 5℃ 인 데다가 어리고 물도 자주 주어야 하기 때문에 겨울철 실내 습도 조절을 겸해서 들여놓았다. 하얀 꽃봉오리가 다닥다닥 올라왔는데 조만간 꽃향기가 퍼지면 어느 날 나도 잠자다가 일어나 재스민에게 수향이라고 부르게 될지도 모르겠다.


선룸 앞에 놓인 플랜트박스엔 화단 가득한 나무도 모자라 욕심내서 사다 심어놓은 퍼플 히더와 테디 그리고 금목서가 초록빛을 잃지 않고 있다. 금목서는 10월에 꽃이 피는데 이것은 또 만리향이라 불린다. 인간의 상술이 놀랍지만 꽃냄새를 맡아보면 그리 불릴만하다 싶다. 은은하고 달콤한 향기가 매혹적이어서 꽃말도 '유혹'이라 붙었다. 별명처럼 금목서도, 서향도 향기가 좋은 꽃인지라 향수나 프래그런스 오일의 원료 중 하나로 쓰인다. 향기로 치자면 치자꽃만 한 게 또 있겠는가. 다 죽어가던 것이 살아나 올해 꽃을 보지는 못했지만, 월동이 어려운 녀석임에도 아직까지 푸른 잎 무성하게 화단을 지키고 있어 내년을 기대하게 한다.


퍼플 히더는 겨울에 뾰족한 잎들이 보라색으로 변한다 해서 이름이 붙여진 듯하다. 역시 겨울엔 침엽수가 그 진가를 발휘한다. 화려하진 않지만 무채색의 계절을 생기 있게 한다. 플랜트박스 옆 화단에 듬직한 주목이야말로 그 주인공이다. 자그마한 태양광 전구를 걸쳐놓았는데 저녁 무렵이면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로 변신한다. 그 외에도 큰 키의 오엽송과 향나무, 반송과 소나무가 있어 꽃 지고 잎 떨군 정원의 휑한 모습을 병풍처럼 가려주고 있다.


아직 겨울 추위는 시작에 불과하지만 장년의 동백과 돌담장의 철쭉, 대문 옆 홍가시나무도 겨울이 무색할 만큼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다. 심지어 매화와 모란은 꽃눈이 조금씩 나와있다. 상사화, 송엽국, 패랭이, 라벤더도 꽃만 피지 않았을 뿐 이파리는 제철의 그것만큼 싱싱하다.


그래도 겨울엔 가려져 있던 진실이 나타난다. 무성했던 이파리 뒤에 감춰졌던 나무의 본래 체형들. 너무 사실적이어서 안쓰럽기도 하고, 알몸의 나뭇가지가 Egon Schiele의 그림이 연상될 만큼 볼품없게 느껴진다. 하지만 덕분에 잎 지고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호수가 드러난다. 한여름 잎이 무성할 때는 잎에 가려져 집 안에선 잘 보이지 않던 호수.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이는 호수의 전경은 겨울이 주는 선물이다.


겨울엔 눈이 꽃이다. 내일 아침엔 초록의 침엽수들 위에 눈꽃이 하얗게 필 것이다. 텃밭과 잔디마당도 눈으로 뒤덮일 것이고. 따뜻한 실내의 안온함에 감사하며 차가운 창 밖의 풍경을 즐길 것이다. 밤새 내린 눈이 펼쳐진 아침마당은 축복이다. 그 하얀 느낌이 너무 좋아서 언제나 발 길 닫는 곳만 치운다. 절대 게을러서가 아니다.


나무와 꽃들의 겨울나기는 미곡처리장에서 미리 사두었던 왕겨를 덮어주는 것으로 마쳤다. 이제 가지치기의 계절이다. 생육이 더딜 때 가지를 잘 정리해주지 않으면 나중에 햇빛을 받지 못해 잘 자라지 못한다. 또 식물의 잎 뒷면에는 광합성 작용과 대사 과정에서 쓰고 남은 유기물이 쌓이는데 이것이 병해충의 먹이가 된다.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노폐물의 처리를 바람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바람을 쐬지 못하면 막힌 변기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추운 날엔 아예 밖으로 나가지 않고 음악과 책으로 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그런데 겨울은 당연히 춥다. 그러니 안에 있는 시간이 더 많다. 저녁이 되면 하나둘 불을 밝히는 정원등과 화목난로의 불을 보는 것이 유희라면 유희랄까? 하루 종일 잘 수도 있고 하루 종일 깨어있을 수도 있다. 심심한 것도 즐길 수 있어야 시골에 사는 맛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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