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어'와 '헐값어'

언어와 사회_하나, 한국어의 굴욕

by 콜랑

'꼴값, 나잇값, 덩칫값, 말값, 몸값, 밥값, 얼굴값, 인물값, 피값, 이름값'. 이런 말에 들어 있는 '값'은 일정한 액수의 돈으로 바꿀 수 없는 '값'이다. 앞말과 관련된 기대치를 비유적으로 나타낸다. 물론, '밥값'처럼 문자 그대로 '밥을 사 먹는 데 드는 값'을 뜻하는 것도 있지만, 이런 것들도 상황에 따라서는 비유적인 뜻을 나타낼 수 있다. '밥값'의 경우, '밥을 먹은 만큼, 나이를 먹은 만 기대되는 행동, 일, 노력 등'을 뜻하기도 한다. 비유적인 뜻을 나타내는 여러 '값'들은 일정 액수의 돈으로 평가될 수 있는 '책값, 쌀값, 전셋값, 집값, 아파트값' 등의 '값'과는 다른 '값'이다.


최근에 '이름값'에 관한 재미있는 보를 접한 적이 있다. 아파트 이름을 새로 지으려고 행정 소송을 하는 일에 관한 보도였다. 아파트 이름이 무언가 있어 보이고 그럴싸해야 아파트값이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아파트 이름을 바꾸겠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내용인즉, 2014년 4월 조사에서 108 제곱미터 기준의 서울 지역 브랜드 아파트 가격은 서울 지역 전체 아파트 평균 가격보다 1억 5천만 원 정도 비싸다고 한다. 과거 주택 복권의 1등 당첨금이 1억 5천만 원이던 시절도 있었는데, 아파트 이름만 잘 지어도 1억 5천이라니! "아파트 이름이 내 체면이 되고 집값까지 좌우하게 되면서 ...(중략)... 건설사도 입주민들도 이 허망한 현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풍경"이 2015년 대한민국의 사회상이다.


아파트 이름이 내 체면이 되고 집값까지 좌우하게 되면서 ...(중략)... 건설사도 입주민들도 이 허망한 현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풍경은 씁씁한 뒷맛을 ...<MBC 시사매거진 2580> 951회

아파트 이름을 '잘 짓는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비싼 값에 거래된다는 소위 '브랜드 아파트'들의 이름을 떠올려 보니 죄다 외국어들인 것 같다. '벨트라움, 푸르지오, 엠코타운, 아이파크, 더샾, 자이, 월드메르디앙, 롯데캐슬, SK뷰' 등등. 영어인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는데 한국어 이름보다 무언가 있어 보이는 느낌이다. 코오롱건설의 '하늘채', 금호건설의 '어울림', 한화의 '꿈에그린', 대한주택공사의 '뜨란채, 참누리', 부영의 '사랑으로' 등도 헐값의 아파트는 아닐 것 같지만 그래도 외국어로 된 이름의 아파트보다는 값이 조금 덜 나갈 것 같다. 1억 5천만 원까지는 아니더라도 5천만 원 정도는 더 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하늘채, 꿈에그린, 뜨란채, 참누리, 사랑으로'. 말만 들어도 부드럽고 정감있는 이름들이지만 왠지 모르게 값은 조금 덜 쳐줄 것만 같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이름값'의 의미를 "명성이 높은 만큼 그에 걸맞게 하는 행동"이라고 풀이한다. '행동'과 연관지어 풀이한 점을 보면 '이름값'의 '이름'은 사람의 이름에 국한될 터. 2015년 대한민국의 사회상을 고려하자면 '이름값'의 사전적 뜻풀이가 조금 바뀌어 되는 건 아닌지. 아니면 '명성'의 뜻풀이에 '예외적으로 아파트는 명성을 갖기도 한다'는 정도의 설명을 추가하든가.


아무튼, 사람들이 아파트 이름을 짓는 방식을 관찰해 보면 요즘식으로 '언어 배틀' 현상이라고 할 만하다. 아쉽다면 한국어가 1승을 거두기가 한국 축구 대표팀이 월드컵 16강에 진출하기보다 어려워 보인다는 점이랄까...! 한국어와 외국어가 격돌하면 한국어는 필패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안방 효과(홈어드밴티지)? 그런 것도 없는 것 같다.


하긴, '언어 배틀'에서 한국어군(軍)은 아파트전(戰)에서만 열세인 것은 아니다. 도처에서 열세를 보이고 있다. '상표 가치'의 자리는 '브랜드 가치'에 빼았긴 지 오래인 것 같다. '이름값, 명성' 역시 어느새인가 '네임밸류'에게 자리를 양보하고서 뒷방 늙은이의 사전 속으로나 물러나 앉았다(철 지난 말이 되어서 사전에서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커피우유'는 커피의 일종인지 우유의 일종인지를 제대로 판정하기도 전에 '밀크커피'에 밀려나나 싶었는데, 어느 나라 출신인지도 모르는 '까페라떼'가 등장하는 바람에 '커피'와 '밀크'의 조화를 음미할 겨를마저도 없었다. 최후의 저항군 '녹차'마저도('녹차라떼') '그린티'에('그린티라떼') 패했다. 설마, '서울우유'가 '서울라떼'로 바뀌는 일은 없겠지?


2015년 현재. 한국어는 '상표어'의 가치를 발휘하지 못하는 '헐값어'가 되어가고 있다. 아니, 이미 되었나? 온갖 종류의 외국어들이 자기가 '브랜드어'랍시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장난감, 만화, 게임 등 아이들 대상의 문화 상품들은 국산품조차도 외국어명 일색이다. 어떤 때는 외국들도 잘 모를 법한 이름도 보인다. '터닝메카드'는 영어권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일까?


필자와 연식이 비슷하다면 한번쯤은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는 어휘력을 길러야 한다고 해서 열심히 한자를 외웠다. 대학에서는 전공 분야의 영어 단어를 외우느라 고생 꽤나 했다. 사회 생활 좀 하려니까 카페로 바뀐 커피숍의 메뉴판에서는 벌써 영어가 힘이 다해간다. 애들 한둘 있으면 일단 외우고 봐야 하는 '터닝메카드'같은 말도 한둘이 아니다. 곧 중국어 대세 시대가 올 것 같다. 다 까먹은 한자들이 그립기만 하다. 그냥, 좀, 한국어만 쓰면 안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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