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도당뇨 판정을 받다.
건강검진 결과지를 받아 든 날, 나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수치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당화혈색소 12.5%.
일반인의 해당 수치는 6.0%라고 한다. 초고도당뇨다. 알아보니 1000명중 1명이라고 한다.
“치료를 바로 시작하셔야 해요.” 의사의 말은 차분했지만, 그 말보다 숫자의 무게가 먼저 가슴을 눌렀다. 돌아오는 길에 창밖을 바라보다가 문득, 지난 반년을 떠올렸다. 체중이 줄고 있단 건 알고 있었다. 바지가 헐렁해지고, 거울 속 내 얼굴도 한층 갸름해졌지만, 바쁜 일상 속에서 “걸으며 출퇴근하니 효과를 보는구나”라고 단순히 넘겼던 것이었다.
알고 보니 그건 내 몸이 조용히 보낸 경고였다. 반년만에 17킬로그램이 빠져 있었고, 나는 그 사실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두려움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한편으로 고요했다. 그런데 결과지를 함께 들여다보던 아내의 표정이 내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말을 아끼던 아내는 집에 돌아온 뒤, 조용히 내 약 봉투를 식탁에 올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아픈 건 나인데, 늘 걱정하는 건 아내였다.
그날 이후 우리 부부의 식탁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하얀 쌀밥 대신 현미밥이 올라오고, 국물은 염분을 줄여 슴슴해졌다. 단 음식, 튀긴 음식은 아예 사라졌고, 아내는 모든 식재료의 성분표를 꼼꼼히 확인하기 시작했다. 나는 하루 만 보 걷기를 목표로 운동을 시작했고, 간식은 입에 대지 않았다. 처음엔 조금 힘들었지만, 몸은 점차 적응해갔다. 무엇보다 아내가 나보다 더 진지하게 식단을 챙기고, 내가 숟가락을 들 때마다 묵묵히 옆에서 바라보는 그 눈빛에 나는 매번 다짐을 되새겼다.
예전 같으면 피곤하다고 눕거나, 바쁘다는 핑계로 대충 끼니를 때우던 내가, 이제는 하루하루를 조심스레 살아간다. 숫자 하나가 인생의 방향을 바꿨고, 늦은 나이에 나는 다시 태어난 셈이다. 당뇨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지만, 나를 멈춰 세우고 돌아보게 한 계기였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수치에만 매달리지 않는다. 매일 아침 일어나 걷고, 아내가 준비한 식사를 감사히 먹으며, 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50대 중반의 어느 날, 내 인생의 특이점은 그렇게 조용히 찾아왔다. 그리고 나는 그 지점을 출발점으로 삼기로 했다. 지금 이 삶을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이, 이 변화에 대한 가장 좋은 보답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