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지

by KOSAKA

빈 원고지는
하얀 바다 같다.
아직 그 누구의 발자국도 없고,
아직 그 누구의 목소리도 닿지 않은,
순결한 침묵의 바다.


펜촉을 들면
마치 노를 쥔 듯 손끝이 떨린다.
첫 줄은 망설임 속에서
서툴게 흔들리지만,
그 흔들림이 있어야만
물결이 시작된다.


때로는 잉크가 번져
뜻하지 않은 얼룩이 남기도 한다.
그러나 바다는 얼룩마저 품는다.
실패의 흔적도
결국은 파도의 일부가 된다.


당신이 쓴 한 글자, 한 행,
그 모든 것들이 모여
저 멀리 지평선을 연다.
당신의 노를 따라
바다는 점점 더 깊어지고,
그 속에서 뜻밖의 빛이 피어난다.


원고지는 기다린다.
주저하는 당신을,
쓰다 멈춘 당신을,
다시 돌아올 당신을.


그 기다림 속에서
당신의 문장은 천천히
별빛처럼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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