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건물과 격차 속에서 시작된 나의 고등학교 시절
당화혈색소 수치는 안정을 찾아가고 있고, 나의 과거를 떠올리며 즐거움과 괴로움을 동시에 맛보고 있지만, 일단 시작한 이 연재는 갈 데까지 한번 가보겠습니다.
중학교 2학년 무렵, 나는 서울 끝에서 끝으로 전학을 했다. 이유를 몰랐지만, 나중에 어머니가 학군 때문이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 선택 덕분에 나는 명문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부모의 결정이 내 인생의 진로를 이렇게 바꿔놓으리라 짐작하지 못했다.
고등학교의 공기는 달랐다. 교실에 들어서면 긴장감이 공기처럼 감돌았다. 아이들은 저마다 참고서를 쌓아놓고, 수업 종이 울리기도 전에 책을 펼쳤다. 시험 전날의 교실은 더욱 고요했다. 떠드는 아이는 거의 없었고, 모두가 묵묵히 책장을 넘겼다. 그만큼 공부가 삶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분위기가 공부만으로 채워진 것은 아니었다. 체육 선도부 교사는 죽도를 들고 다니며 학생들을 통제했고, 국어 교사는 동전을 양말에 넣어 체벌 도구로 삼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믿기 힘든 일이었지만, 그 시절에는 체벌이 교사의 권위이자 교육의 한 방식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학교 건물은 수십 년간 제대로 보수되지 않아 비가 오면 여기저기서 물이 샜다. 천장과 벽에는 보기 흉한 얼룩이 겹겹이 남아 있었다. 학교 재단은 규모가 큰 편이어서 넓은 부지 안에 고등학교, 외고, 여중, 여상, 나중에는 대학교까지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같은 울타리 안에서도 차이는 분명했다. 특히 우리 학교와 외고 학생들 사이의 빈부 격차는 쉽게 드러났다. 우리는 늘 걸어서 등하교를 했지만, 그들은 스쿨버스를 타고 오갔다. 우리 교복은 얄팍한 원단에 투버튼이었고, 그들의 교복은 질 좋은 원단에 포버튼이었다.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운동장을 공유했지만, 교복의 재질과 통학 방식만으로도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내 자리는 다행히 맨 앞줄이었다. 수업을 따라가기에는 유리한 자료였다. 성적은 전교 상위권을 유지했지만, 수학은 늘 약점이었다. 수학 단과 학원에 잠시 다니기도 했지만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대신 영어는 자신 있었다. 중학교 때부터 잘 다져온 바탕 덕분에 고등학교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결국 나의 좌표는 ‘수학은 부족하지만 영어는 잘하는 학생’이라는 단순한 문장으로 요약되었다.
수업이 끝난 저녁에는 교내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 시절 누구나 그랬겠지만 야간 자율학습이 일상처럼 이어졌다. 집에서는 집중이 쉽지 않았고, 도서관의 공기는 나를 책상에 붙들어 놓았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 형광등의 윙윙거림, 창밖에서 들려오는 겨울 바람의 기척이 묘하게 어울렸다. 가난했지만 공부만큼은 포기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그 자리를 지탱해 주었다.
공부 외에도 나를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고등학교 1~2학년 무렵, 나는 일본 애니메이션과 음악에 깊이 빠졌다. 《초시공요새 마크로스》, 《공작왕》 같은 애니메이션은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친구들과 포터블 비디오를 돌려보며 화면 속 우주와 전투에 몰입했다.
음악은 또 다른 문을 열었다. 일본 펜팔 친구로부터 테이프를 선물받았던 안전지대, 마츠다 세이코의 노래는 한국 가요와는 다른 세련됨을 지니고 있었고, 그 차이를 뚜렷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애니메이션과 음악은 공부로만 채워진 나날 속에서 작은 탈출구이자 또 다른 배움의 장이었다.
나의 일본어 독학은 그 꽉 짜인 구조 안에서도 계속됐다. 일본어 공부라는 명목으로 답답한 일상에 나만의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학교에서 지정한 제2외국어는 독일어였기 때문에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는 독일어로 봐야 했다. 그러나 선택 가능한 모의고사에서는 일본어를 택했다.
전교에서 일본어 시험을 치른 학생은 나 혼자였기 때문에, 몇 점을 받아도 언제나 1등이었다. 이 작은 1등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나에게는 분명한 자기만족과 즐거움이었다. 애니메이션과 음악으로 열린 창이 언어라는 형태로 확장된 순간이었고, 훗날 일본어를 본격적으로 공부하는 토대가 되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모든 것은 입시로 수렴되었다. 나는 학력고사 세대였다. 수학은 끝내 발목을 잡았지만, 국어와 영어로 균형을 맞추며 버텼다. 시험이 끝나고 결과 발표를 기다리던 2주는 인생에서 가장 길게 느껴진 시간이었다. 불안과 좌절 속에 지하실에 틀어박혀 고전 명작을 뒤적였다. 활자에 눈을 두고 있어도 마음은 늘 붕 떠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간절함’이라는 감정을 깊이 체험했다. 인생을 살면서 무언가를 그렇게 간절히 바란 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