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첫눈에 반하다

낭만과 재난 사이

by KOSAKA

1.

지난 12월 4일, 서울 상공에 내린 것은 단순한 눈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록이었다. 1907년 기상 관측 이래 117년 만에 가장 많은 눈이, 그것도 '첫눈'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쏟아졌다.


보통의 첫눈이란 흩날리는 벚꽃잎처럼 가볍거나, 땅에 닿자마자 녹아버리는 수줍은 인사에 가깝다. 하지만 이날의 눈은 달랐다. 서울 적설량 20cm 이상, 경기도 일부 지역은 40cm 육박. 기상청의 예보를 비웃기라도 하듯, 하늘은 도시 전체를 두터운 백색의 담요로 덮어버리기로 작정한 듯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물량 공세였다.


11월의 늦가을 정취가 채 가시기도 전에 들이닥친 이 이례적인 폭설은,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의 풍경을 단 하룻밤 사이에 완벽하게 바꿔놓았다.


2.

'첫눈에 반하다'라는 말은 기묘하게 중의적이다.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진다는 뜻(Love at first sight)이기도 하고, 그해의 첫 번째 눈(First snow)에 마음을 빼앗긴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날의 폭설은 사랑이 찾아오는 방식과 꼭 닮아 있었다.


사랑은 늘 예고 없이, 무례할 정도로 갑작스럽게 들이닥쳐 나의 질서 정연한 일상을 무너뜨린다. 거부할 수 없는 압도적인 힘으로 내 시야를 가리고, 이성적인 판단을 마비시킨다.


창밖으로 쏟아지는 그 무지막지한 눈을 보며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온 세상이 하얗게 지워진 풍경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소음이 묻힌 도시는 고요했고, 익숙했던 거리는 낯선 설국이 되어 나를 홀렸다.


우리는 그 압도적인 풍경 앞에서 멍하니 탄성을 내질렀다. 불가항력적인 아름다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이 멈춰버린 그 순간, 우리는 꼼짝없이 그 눈에 반해버릴 수밖에 없었다.


3.

하지만 창문 틈으로 스며든 냉기처럼, 낭만의 시간은 짧고 현실의 고통은 길었다. 눈에 반했던 찰나의 순간이 지나자,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반(反)'할 수밖에 없는 처참한 현실이었다.


그토록 예고된 폭설이었음에도, 서울시와 경기도의 행정은 눈 속에 파묻힌 듯 보이지 않았다. 도로는 거대한 주차장이 되었고, 시민들은 퇴근길 도로 위에 갇혀 10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제설차는 보이지 않았고, 대중교통 증편이나 비상 수송 대책은 한 박자, 아니 두 박자 늦었다.


첫눈에 반했던 설렘은 분노로 바뀌었다. 12월 4일, 우리는 자연의 위대함에 감탄했지만, 동시에 인간이 만든 시스템의 허술함에 절망했다.



아름다움은 찰나였고, 마비된 도로는 길었습니다. 다음 눈이 올 때는 부디 낭만만 즐길 수 있기를, 우리의 일상을 지키는 시스템이 눈보다 먼저 도착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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