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계획이 어긋난 자리에서 비로소 인생은 시작된다
법률 용어인 ‘미필적 고의’는 차갑고 건조하다. 자기의 행위로 인해 어떤 결과가 발생할 가능성을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가 일어나도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이는 심리 상태를 뜻한다. 하지만 이 ‘미필적’이라는 수식어를 인생 앞에 붙여보면, 그 안에는 의외의 따뜻한 위로와 해방감이 숨어 있다. 미필적 인생. 그것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설계하고 통제할 수는 없지만,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더니 도달하게 된 현재를 기꺼이 나의 것으로 수용하는 태도다.
현대인은 모든 것을 자신의 의지 아래 두어야 한다는 강박 속에 산다. 몇 살에는 어떤 위치에 있어야 하고, 모든 선택은 반드시 의도한 결과로 이어져야 한다는 정교한 기획안을 품고 살아간다. 하지만 삶은 그 기획안의 여백을 비웃듯 끊임없이 변수를 던진다. 우리가 느끼는 극심한 불안과 긴장의 실체는 대개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 그 자체가 아니라,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어야만 한다는 오만한 믿음에서 기인한다. 완벽한 통제에 대한 갈망이 클수록, 예상치 못한 작은 균열에도 삶은 쉽게 무너져 내린다.
인생은 단단한 바위를 깎아 하나의 형상을 만드는 조각이라기보다, 시시각각 변하는 파도 위를 달리는 항해에 가깝다. 조각가는 바위의 모든 각도를 통제하려 들지만, 항해사는 파도를 통제할 수 없음을 안다. 항해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바람의 방향에 맞춰 돛을 조절하고, 밀려오는 파도의 리듬에 몸을 맡기는 것뿐이다. 우리가 맞이하는 현재는 대개 확정적인 계획의 결과라기보다, 수많은 우연과 선택이 겹쳐 만들어진 미필적 결과물이다. 지금 우리가 머무는 공간, 맺고 있는 인연, 하고 있는 일들 중 완벽하게 10년 전의 계획과 일치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인생이 대부분 미필적으로 흘러간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비로소 어깨의 힘이 빠진다. 성취가 오로지 나의 고의에 의한 것이 아니듯, 실패 또한 온전히 나의 잘못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조적 태도는 무책임과는 다르다.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에서는 최선을 다하되,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서는 "그럴 수도 있다"는 넉넉한 마음을 갖는 것이다. 힘을 뺀 삶은 유연하다. 부러지지 않고 흐름을 타며, 예상치 못한 곳에서 피어난 뜻밖의 기쁨을 발견할 눈을 갖게 된다.
결국 인생은 우리가 고의로 완성하는 완결판이 아니라, 수많은 우연이 빚어낸 미필적 예술작품이다. 내 계획이 틀어질 때마다 좌절하는 대신, 인생이 나를 위해 준비한 또 다른 우회로를 궁금해하는 여유가 필요하다. 우리가 의도하지 않았던 그 무수한 미필적 순간들이 모여, 결국은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고유한 서사를 완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설계된 정답을 폐기하라. 당신의 기획안이 갈기갈기 찢겨나간 그 참혹한 여백 위에서야말로, 단 한 번도 의도된 적 없기에 가장 눈부신 진짜 인생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