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 The Beginning 3

나니와에서 시작된 것 – 오사카 도시의 기원과 백제계 기술자들

by KOSAKA

위 이미지의 두 불상은 각각 한국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왼쪽)과 일본 나라 중궁사(中宮寺)의 목조반가사유상(오른쪽)으로, 동아시아 불상 조형사에서 깊은 연관을 보여주는 대표적 작품들이다. 두 상 모두 반가 자세로 앉아 오른손을 뺨에 대고 깊은 사유에 잠긴 모습이며, 삼국시대 한국에서 유행한 금동불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한국 반가사유상은 6세기 후반 백제 혹은 신라계 양식을 대표하며, 일본 중궁사 반가사유상은 7세기 중엽에 제작된 것으로 백제에서 건너온 장인들 또는 귀화계 기술자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자세, 표현, 머리장식 등에서 유사성을 공유하는 두 불상은 백제 불교조형이 일본에 전파된 실제 사례이자, 문화 교류의 정교한 미적 흔적을 보여주는 중요한 비교 대상이다.


오사카 이전의 이름, ‘나니와(難波)’는 일본 왕정 초창기의 숨은 중심지였다. 지금은 간사이의 경제수도, 번화한 상업도시로 알려져 있지만, 오사카는 원래 정치의 도시였다. 그리고 그 정치의 기원은, 한반도였다.

오사카 중심부에 위치한 나니와노 미야(難波宮) 유적지 전경으로, 7세기 중반 백제계 기술자들이 건설한 고대 궁성의 터이며, 오늘날 도심 속 역사공원으로 보존되어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를 보면 나니와는 이미 5세기 후반 긴메이(欽明) 천황 때부터 ‘국제항’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해왔다. 그러나 도시로서의 성격이 본격화된 것은 7세기 중반 나니와노 미야(難波宮)가 건설되면서다. 645년, 소가씨(蘇我氏)를 무너뜨린 나카노오에 황자(中大兄皇子)는 나니와를 새로운 정치 중심지로 삼아 궁전을 짓고, 그곳에서 ‘다이카 개신(大化改新)’을 단행한다. 이 시기는 일본에서 가장 급격한 국가체제 개편이 이뤄졌던 시기이며, 그 개편의 배후에는 한반도계 이민자 집단, 특히 백제계 기술자들과 문물 관리자들이 있었다.


나니와는 단지 새로운 수도가 아니었다. 바다와 강이 만나는 입지에 세워진 이 도시는 요도가와(淀川) 수계의 하구에 위치해 있었다. 이 하구는 서일본과 한반도를 잇는 해상 교통의 출발점이자 도착점이었다. 백제에서 출발한 선박들이 닿는 첫 번째 항구이자, 외래 문물과 인적 자원이 유입되는 관문으로 기능했다. 이 점에서 나니와는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 문명과 문명이 만나는 교차지였다. 실제로 나니와항에서는 습지 개간, 수로 정비, 목조건축, 물류 조직 등 백제계의 고도화된 도시 기반 기술이 적극적으로 이식되었으며, 이는 도시 건설에 참여한 장인 집단들의 출신 성분과 기술 전통에서 확인된다.


예를 들어, 나니와궁 유적에서 출토된 기와는 사비기 백제 왕릉에서 확인되는 문양과 매우 유사하며, 당시 목재 가공 방식이나 도장식의 기법 또한 한반도 중남부에서 유행하던 기술과 일치한다. 일본 고고학자 나카무라 고이치(中村康一)는 이를 “기술의 단순 모방이 아닌, 백제계 기술자들이 직접 참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해석하였다. 이 시기의 관아 유적에서는 중국식 율령 체제의 이전 단계에 해당하는 유연한 관청 구조가 나타나며, 이는 백제 및 가야의 행정체계와 유사한 점이 많다. 당시 나니와의 행정기록을 담당한 이들 역시 귀화계 도래씨족으로, 아야씨(漢氏)나 야마토노아야씨(東漢氏)가 핵심적 역할을 했다.


특히 백제계 도시계획이 나니와에서 구현된 정황은 매우 뚜렷하다. 백제의 사비성(泗沘城)은 금강을 따라 건설되었으며, 하천을 방어선이자 물류망으로 삼고, 정사각형 구획 안에 궁성과 시가지를 배치한 점에서 나니와와 구조적 유사성을 갖는다. 일본 사학계에서도 이러한 구조적 유사성을 ‘계획도시 개념의 수입’이라고 분석하고 있으며, 이는 야마토 내부에 존재하지 않던 도시관이 외래적 기반 위에 성립되었음을 시사한다. 나니와에서 시작된 이 도시구조는 이후 후지와라쿄, 헤이조쿄, 그리고 헤이안쿄로 이어지며 일본 고대 수도계획의 전범으로 자리 잡는다. 즉, 한반도계 문명의 이식이 단발성 프로젝트가 아니라, 도시라는 구조의 뼈대를 바꾼 문화적 이식이었다.


그런데도 나니와는 그리 오래 수도로 기능하지 못했다. 8세기 중반, 정치 중심은 나라로, 다시 교토로 옮겨가며 나니와는 외항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도시의 기능은 사라지지 않았다. 교역의 거점, 선박과 화물의 중계지, 문화와 사람의 집결지로서 나니와는 오사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고, 이후에도 끊임없이 ‘바다를 향한 도시’라는 정체성을 유지해왔다. 무로마치~에도시대에는 사카이(堺)와 오사카항이 연결되며 중세 상업도시로 성장했고, 메이지 이후에는 근대적 무역항으로 개조되었다. 이 모든 흐름은, 초기 오사카를 만든 백제계 기술자들의 유산 위에 쌓인 층위들이었다.

히라카타시에 위치한 백제사터와 백제왕신사

고고학적으로도 이 흐름은 입증되고 있다. 오사카 동북부 일대, 히라카타시(枚方市) 일대에서는 5~7세기에 걸친 도래계 귀족 무덤과 관청터가 다수 확인되며, 이들 고분에서는 한반도 특유의 철제 무기, 마구, 의복 부속품 등이 출토되고 있다. 일부 전방후원분에서는 사비기 백제 양식의 석실 구조가 재현되어 있어, 단순한 문화 영향이 아닌 직접적인 기술자·권력자의 이주 정황이 제기된다. 특히 히라카타의 미야하라 고분(宮原古墳)은 무령왕릉과 유사한 마구류 출토로 주목을 받았으며, 고고학계 일각에서는 이 고분이 백제계 외척 집단의 장묘공간일 수 있다는 가설을 내놓고 있다.


오늘날의 오사카도 이러한 구조 위에 존재한다. 간사이국제공항과 연결된 오사카만 연안 항만지대는 여전히 ‘바다를 향한 도시’의 성격을 유지하고 있으며, 코리아타운으로 불리는 쓰루하시(鶴橋)와 이쿠노(生野)는 백제계와 조선계의 후손들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정체성을 피상적인 민족 분포나 현대의 이민사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 오사카라는 도시는 태초부터 ‘외래의 지식과 기술’을 품고 있었고, 그 외래의 시작점이 백제였다는 사실은, 이 도시의 역사적 깊이를 새롭게 인식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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