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분이 말하는 것 – 한반도계 엘리트의 흔적과 일본 왕정의 기원
위 이미지는 일본 나라현(奈良県) 호류지(法隆寺)에 소장된 국보, 이른바 ‘백제관음(百済観音)’으로 불리는 목조 관세음보살입상이다. 높이 약 210cm의 늘씬한 비례, 알현하듯 가볍게 내민 오른팔과 왼손에 든 정병(淨瓶), 화려하면서도 균형 잡힌 보관과 두광(頭光)의 장식은 7세기 중반 백제 조각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일본학자들은 이 불상이 백제 장인 또는 백제계 이주 장인의 손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며, 특히 백제의 미륵사 불상 및 능산리 출토 금동관음상과의 조형적 유사성은 이 불상이 단순한 종교 조각을 넘어 백제와 일본 간 문화교류의 상징물임을 보여준다...어제 가본 일본 국보전에 전시되어 있었고, 일본 고대 불교조각의 최고봉 중 하나로 꼽힌다고 한다.
『고사기(古事記)』는 신들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천손강림(天孫降臨), 바다를 건넌 신라의 왕자, 그리고 스사노오노미코토(須佐之男命)와 같은 정복자 신들은 어렴풋이 일본이라는 나라의 기원을 암시한다. 하지만 신화는 결국 기록이다. 기록은 그 자체로 권력이며, 때때로 승자의 설계다. 그렇다면 이 기록이 실재했던 권력 구조와 어떻게 맞물렸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우리는 땅을 파야 한다. 고분(古墳), 바로 그 무덤들이다.
3세기 후반부터 7세기 중엽까지 열도 전역에 걸쳐 축조된 거대한 무덤들은, 문자 이전의 권력자가 무엇을 보여주고자 했는지를 웅변한다. 그 중심에는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이라는 특이한 형태의 무덤이 있다. 앞은 사각형, 뒤는 원형으로 구성된 이 무덤 형식은 야마토(大和) 지역을 기점으로 퍼져 나가며, 통일적인 권력 상징의 장치로 기능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전방후원분과 그 안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한반도, 특히 백제와의 연결고리를 강하게 드러낸다는 데 있다.
오사카부(大阪府) 하비키노시(羽曳野市)에 있는 오진(応神)천황릉으로 추정되는 고분을 비롯해, 나라현(奈良県), 효고현(兵庫県) 일대 고분에서는 백제나 가야 지역에서 유입된 것으로 보이는 청동제 거울, 철기, 마구, 심지어 도기와 장신구가 다수 발견된다. 이 유물들은 단지 교역을 통한 유입이 아닌, 제작 기술의 이전 또는 귀화인 집단의 활동을 암시한다. 특히 말안장, 철편(鐵片), 마구 세트는 일본에 기마병 문화가 도입되는 시점과도 맞물리며, 군사적 엘리트의 이주 가능성을 시사한다.
대표적인 예로 오사카 다이토시(大東市)의 시조나와테 고분(四条畷古墳)군이나, 교토 남부 기즈강 일대의 고분들에서 확인되는 출토품은 백제 중부지역 유물군과 문양과 재료가 놀라울 만큼 유사하다. 이는 한반도 남서부의 상류 귀족층이 일본 열도로 이주했거나, 그 기술자 집단이 일본 권력자의 보호 아래 상주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다만 이들이 직접 왕위에 올랐는지는 단정할 수 없지만, 권력자와 혼맥을 이루거나, 문화적 패권을 행사한 사례는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이와 맞물려 주목되는 것이 귀화계 씨족이다. 5세기 이후 일본 조정에는 ‘도래계’라 불리는 한반도 출신 씨족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아야씨(漢氏)는 왕인 박사의 후예로 여겨지며, 학문과 문서 행정을 담당했고, 기비씨(吉備氏)는 기술·군사 부문에서 활약했다. 또한 사카노우에씨(坂上氏)는 궁정 내위 군사력을 맡은 가문으로, 간무천황(桓武天皇)의 외척인 다카노노 니가사(高野新笠) 역시 이 계통과 연결된다. 『속일본기(続日本紀)』는 니가사를 백제 무령왕(武寧王)의 후손이라 명시한다. 왕족으로서 직접 왕위에 오르지 않았더라도, 일본 왕정의 정통성을 지탱하는 중요한 외척으로 작용한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귀화계 귀족의 흔적이 단순히 '문화적 영향' 수준을 넘어서 권력 구조의 구성원이었다는 점이다. 고분 내의 부장품 구성, 석실의 형식, 묘제의 전통은 점차 야마토 지역에서 백제화(百済化)되는 양상을 보인다. 예컨대 석실 구조에 있어 초기에는 일본식 단순 봉분이 많았으나, 5세기 중반부터는 백제의 능산리고분(陵山里古墳)을 연상시키는 벽돌식 석실이 등장하며, 이것이 규슈와 긴키지방에 퍼지게 된다. 이 변화는 무기 단위의 문물 이전이 아닌, 장례관념과 왕권 상징의 이식이라는 차원에서 해석될 수 있다.
당시 양국의 횡혈식 석실분 비교에 대해서는 브런치스토리에 자세한 분석글이 있다
https://brunch.co.kr/@6d628988d880499/16
최근의 일본 고고학계는 이 점에 주목하고 있다. 이노우에 미쓰사다(井上光貞)는 『古代国家と東アジア』(1985)에서 5세기 중반 이후 전방후원분의 구성은 단지 국내 권력 통합의 결과가 아니라, 동아시아 국제 정세 속에서 백제계 엘리트가 권력 질서에 깊숙이 관여했음을 말해주는 증거라고 강조했다. 또한, 오사카부 히라카타시(枚方市)의 미야하라 고분(宮原古墳) 분석에서, 마구류 출토물과 묘제의 유사성이 백제 중서부 귀족 계층과 연결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본 내에서 '왕묘'로 분류되는 전방후원분들이 실제로는 외래계 엘리트 집단의 무덤일 가능성을 일부 인정하기도 했다.
결국 일본 고대사에서 ‘순혈적 천황가’ 또는 ‘단일계 왕통’이라는 전제는 고분과 유물이 말하는 바와 다소 어긋난다. 오히려 신화로 포장된 도래신(渡来神)의 흔적은 땅속 유물로 연결되고, 그것은 귀화인의 현실적인 권력 참여로 이어진다. 문자 이전, 기록 이전의 시대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진실은 묘하게 명확하다. 백제는 문화의 전파자가 아니라, 구조의 설계자였다. 그리고 고분은 그 설계가 실현된 장면이었다.
다음 편에서는 이러한 흐름이 한 도시, 곧 오사카(大阪)라는 공간에서 어떻게 현실화되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왜 백제계 엘리트는 나니와(難波)를 거점 삼았는가. 강과 무역, 기술과 통치가 만나는 그 접점에서, 우리는 또 다른 권력의 이주사를 만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