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진 사찰이 전하는 것
신사이바시에서 미도스지선을 타고 네 정거장을 남쪽으로 내려오면, 텐노지 언덕을 감싸고 도는 주택 골목마다 숨은 빈터가 군데군데 나타난다. 대여섯 대의 승용차가 겨우 들어가는 자갈 마당, ‘무단 주차 금지’ 팻말만 덩그러니 서 있는 모퉁이, 담장 틈새로 삐죽 올라온 잔디 사이로 녹이 슨 기와 파편이 반짝이는 곳도 있다. 안내 표지 하나 없는 이 공지(空地)들이 바로 7 세기 말 한반도계 이주민이 세운 신라사(新羅寺) 와 백제사(百済寺) 의 터라고 고고학 조사 보고서는 적고 있다. 두 사찰의 이름은 『続日本紀』 天平宝字 8년(764) 기록에 “難波百済寺沙門──舟人安堵を祈請す”라는 단 한 줄로 남아 있고, 항구 선원들의 해상 안전을 빌었다는 기록만으로도 난바(難波) 항과 사찰이 긴밀히 맞물려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한다.
난바 항 구역에 백제·신라계 공동체가 들어선 배경은 『新撰姓氏録』 “摂津国百済郡百済王” 항목이 말해 주듯, 백제 왕족 후예 백제왕씨(百済王氏) 가 7 세기 후반 난카이도 관문에 정착하며 자신들의 씨사(氏寺)를 열었던 데서 비롯된다. 신라계 이주민은 기록이 훨씬 적지만, 오사카 역사박물관이 정리한 난바궁 출토 목록에는 신라 특유의 흑유 기와와 통일신라 토기가 함께 보고되어 존재를 물증으로 보강한다. 사찰은 왕실 직영 사원과 달리 항만 노동자·장인·상인이 십시일반 시주한 ‘이민 공동체 사찰’이었고, 방선(舫船)·창고·의료 시혜소까지 겸해 도시 공공재 역할을 했다.
그러나 8 세기 후반 수도가 헤이안쿄(平安京)로 옮겨 가면서 난카이 항로의 세력이 급격히 꺾였다. 시주와 인력이 끊긴 터에 887년(인화 3) 난바 항만 대화재가 겹쳤다. 『日本三代実録』은 “難波官舎・倉庫數百区焼亡”이라 적어 관청과 창고, 민가가 대거 소실됐음을 전하지만 사찰 이름까지 상세히 기록하진 않았다.
대신 텐노지 오우사카 공터를 시굴한 오사카 시립대학 조사단 보고서(1987)는 화재열로 적갈색 변색된 토층과 뒤엉킨 건물재 흔적을 들어 “불길에 사찰 건물이 함께 무너졌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같은 보고서에서 출토된 복련(複蓮) 문양 백제계 수막새와 흑유 신라 기와가 동일 문화층에서 발견돼 두 사찰이 재건 과정에서 자재를 뒤섞었거나 한 터에 공존했을 가능성도 제기됐다.
불탄 폐허는 ‘절터 밭(寺跡野)’으로 불리며 중세 내내 밭과 무밭으로 쓰였다. 15 세기 초 작성된 『難波港田地帳』에는 “新羅寺跡田 一段二畝” 같은 항목이 보이는데, 사찰은 사라져도 지명은 경작지 명칭으로 살아남아 길 안내 구실을 했다. 에도 시대 난바가 상업항으로 다시 번성했지만, 막부는 방화·치안을 이유로 항구 주변에 대형 목조 건물 신축을 금지했다. 묘하게도 그 금령 덕분에 사찰터는 아파트나 창고 부지로 편입되지 않았고, 근세 양식에 맞춘 석주나 비석도 세워지지 않았다. 오늘날 방문자가 보게 되는 것은 철제 울타리와 잡초, 그리고 땅속에 묻힌 기와층뿐이다.
근대화 바람이 불던 1880년대, 오사카부 학무과는 초등학교 후보지를 물색하다가 “百済寺跡地、地中より瓦片多出ニ付建設見合セ”라고 일지에 적어 공사를 포기한다. 이후 땅은 민간 소유로 넘어가 주차장이나 창고로 쓰였지만, 발굴 때마다 백제·신라 양식 기와가 쏟아져 나오는 바람에 대규모 개발은 번번이 무산됐다.
21세기 들어 빈터는 새로운 문화 자원이 되고 있다. 2009년 오사카 역사박물관은 난바궁 발굴 50주년 특별전에서 신라 토기·백제 기와를 한 케이스에 나란히 전시하며 “難波港 韓半島系寺院の痕跡” 섹션을 꾸렸다. 전시 패널엔 지하 60 센티 아래 복련 수막새 사진과 함께 ‘南海’ 음각 기와 클로즈업이 실려, 관람객에게 항로와 사찰의 상관성을 시각적으로 전달했다. 한편 텐노지구 세이쿠다니(細工谷) 유적에서는 1990년대 대형 목조우물 안쪽에서 ‘百済尼’ ‘百尼’라 먹줄로 쓴 토기가 대량 발견돼, 여성 출가 공동체의 존재가 공식 확인됐다. 이 결과로 시는 텐노지·사이쿠다니·도가시바 세 구역을 잇는 3.2㎞ ‘백제 루트’ 산책로를 지정하고 인도 블록에 청동 방향타 모티프를 박아 두었다.
사라진 신라사 쪽은 아직 퍼즐이 덜 맞춰졌다. 逢阪 2丁目·六万体·夕陽丘 세 후보지가 나왔지만, 구체적 가람 배치를 드러낼 정도의 발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사카 시 문화재협회는 2025년 난카이전철 지하화 공사 전 실시될 대규모 발굴에서 “新羅寺関連遺構の確定”을 목표로 내세우고 있다. 고증이 마무리되면 난바 사찰군의 지도는 처음으로 완전한 윤곽을 얻을 것이다.
빈터는 여전히 말을 아끼지만, 도시 사람들은 그 자리를 스스로 기억 장치로 바꾸었다. 텐노지 구청과 오사카 역사박물관은 2022 년부터 매년 봄 ‘난바궁·백제·신라 기와 워크숍(難波宮かわらワークショップ)’을 열어 발굴 기와 모양의 석고판에 방문객이 자유롭게 글자를 새기고 채색하게 한다. 아이들은 ‘백제’ ‘신라’라는 한자나 한글을 적어 넣고, 학예사는 “1300 년 전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 여기 큰 절을 지었다”고 짧게 설명한다. 완성된 기와는 전기 가마에서 구워져 기념품으로 돌아가는데, 구워지는 동안 야외 무대에선 요도가와(淀川) 삼십석배 선부(船夫) 노래를 편곡한 재즈가 흐른다. 오사카 역사박물관의 민속음악 연구팀은 이 선부 노래 후렴이 경북 지역 굿소리 ‘메나리토리’ 일부와 음계·박자가 겹친다고 분석해 학술지 「地域文化研究」(2021) 6호에 게재했다. 사라진 사찰이 남긴 기와 조각, 항구 노동자의 옛 노래, 한글 글씨가 적힌 어린이 작품이 한 무대 위에서 겹치며 시대와 문화를 뒤섞는다. 절터 위에 더는 불전도 종소리도 없지만, 워크숍과 음악이 소리와 색을 보태면서 도시의 기억은 지금도 증폭되고 있다.
해거름, 텐노지 역 고가 아래를 빠져나와 빈터 앞에 서면 바람이 불어와 먼지를 일으킨다. 눈앞에는 담벼락뿐이지만, 발밑 어딘가에는 백제·신라 승려가 얹은 기와와 바다를 건너온 토기가 켜켜이 묻혀 있다. 발을 한 번 디딜 때마다 백제와 신라, 난바와 오사카, 그리고 오늘을 사는 우리 각자의 시간이 겹쳐진다. 건물이 사라져도 터가 사라지지 않는 한, 사찰은 여전히 도시의 호흡 속에 존재한다. 돌기와 대신 자동차 경적, 목어(木魚) 대신 전철 차륜음이 울리지만, 그 겹침 안에서 오사카는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살아 낸다. 사라진 사찰이 전하는 것은 결국 다양성을 수용해 온 도시의 기억력이고, 그 기억이 지속되는 한 빈터 역시 완결된 역사 서적이 된다. 텐노지 골목을 지나는 행인 중 누구도 종소리를 들은 적 없지만, 누구도 그 흙 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기억은 건물을 넘어 땅에 스며 있고, 땅은 언제나 다음 세대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준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