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중세, 오사카 상인의 탄생과 도시 형성의 흐름
이미지 : 『라쿠추 라쿠가이즈 병풍』(洛中洛外図屏風), 후쿠오카시박물관 소장몬
도시는 어떤 기질로 만들어지는가? 일본 중세를 들여다보면, 전통적인 무사 집단이나 귀족 사회의 그림자 뒤에서 이윤을 따라 흐르는 사람들, 곧 ‘상인’의 존재가 서서히 부상한다. 특히 오사카는 일본 중세에 들어 본격적으로 도시로서의 정체성과 상인의 기질을 갖추기 시작한 지역이다. 평지에 형성된 물류 중심지라는 입지 조건과 함께, 오사카는 중앙 귀족이나 무사 권력의 그늘보다는 상업의 토대 위에 도시 구조가 만들어졌고, 그 속에서 일본적 상인 문화의 원형이 자라났다.
645년, 일본 고대사에서 전환점이 된 다이카 개신(大化の改新) 직후, 고토쿠 천황(孝徳天皇)은 수도를 아스카에서 나니와(현재 오사카)로 옮기며 새로운 정치 실험을 시작했다. 천황은 나니와에 ‘나니와노미야(難波長柄豊崎宮)’라는 궁성을 세우고, 물류와 외교의 요지였던 이 지역을 중앙집권 개혁의 전진기지로 삼았다. 이는 단순한 천도가 아니라, 해상 교통 중심의 새로운 국가 구상이었다. 나니와는 중국·한반도와의 교역에 용이했을 뿐 아니라, 중앙과 각 지방을 연결하는 수로망의 중심에 있었기에, 정치의 수도이자 무역의 중심으로서 중요한 전략적 가치를 지녔다. 이후 이 천도는 본격적인 도시계획과 궁성 축조의 시발점이 되었고, 나니와는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실용적 기능에 기반해 설계된 수도로 기록되었다.
헤이안 시대(794~1185), 오사카 지역은 여전히 '난와(難波)' 또는 '나니와노츠(難波津)'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미 고대 일본의 해상 관문으로 기능했으나, 정치 중심지로서의 역할은 헤이조쿄(奈良), 헤이안쿄(京都)로 옮겨졌다. 그러나 해상 교통의 요지이자 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리적 특성 덕에, 이곳은 정치보다는 물류와 중계무역의 장으로 진화해간다. 도다이지 대불 건립 시절에도, 석재와 목재, 금속이 대륙에서 오사카를 거쳐 나라로 운반된 기록이 있다. 정치가 머문 곳이 아니었던 오사카는, 그래서 더 자유로웠고, 유연했고, 실리적이었다.
가마쿠라 시대(1185~1333)에 이르면, 일본 전국에 사원과 무사 세력이 퍼지며 지역 경제를 형성한다. 특히 고야산(高野山), 도다이지, 시텐노지(四天王寺) 등의 대형 사찰이 이 지역의 상업적 성장과 깊은 관련을 맺었다. 이 사찰들은 수많은 장과 시장(市)를 중심으로 지역 상인들의 활동을 유도했고, 장날에는 지방 무사들과 농민들이 물품을 교환하며 유통망이 점점 확대되었다. 오사카의 시장은 단지 ‘물건을 사고파는 공간’이 아니라, 새로운 정보, 제례와 물산, 그리고 화폐 개념이 교차하는 공공영역이었다. 초기 자본의 축적은 바로 이런 시장경제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오사카의 상인 기질을 본격적으로 형성한 시기는 바로 ‘전국시대’(1467~1590)다. 전란이 일상화된 이 시기, 권력은 무너지고 질서는 혼란스러웠지만, 역설적으로 상인들에게는 기회의 시대였다. 각 지방의 영주는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자국의 특산물을 외부에 판매하고, 외국과의 교역을 시도했으며, 오사카는 그 중계지 역할을 했다. 특히 이즈미(和泉), 사카이(堺)와 연결된 항구들은 명나라, 류큐, 조선과의 거래를 통해 ‘국제 상인’의 기질을 싹틔웠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인물이 바로 사카이의 상인들이다. 이들은 오사카만 남쪽에 위치했지만, 오사카와 거의 일체화된 경제권을 형성했고, “무사가 지배하지 못한 자치 상인 도시”로 불렸다. 사카이는 도시를 방어하기 위한 무장을 갖추면서도, 유럽식 길드와 유사한 상인 조합, 신용 기반 거래 시스템을 운영하며 합리적인 이윤 추구와 도시 공동체의 균형을 유지했다. 이러한 모델은 훗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사카성을 중심으로 오사카 도시를 재편할 때 핵심 설계가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등장(1583)은 오사카의 도시 형성에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그는 오사카성을 축성하며, 단순한 군사적 요충지가 아니라 상업·경제의 중심지로 도시를 설계했다. 성 아래에는 센니치마에(千日前), 우에혼마치(上本町), 덴마(天満) 같은 상업지구가 조성되었고, 상인들은 정해진 구획 내에서 점포를 운영하며 세금을 납부하는 방식으로 도시 조직에 편입되었다. 도요토미는 이 상업권력을 철저히 관리하면서도 상인의 자유로운 활동을 장려했고, 이로 인해 오사카는 전란 후 최초로 안정된 시장경제를 이루게 되었다.
도요토미가 실시한 '라쿠이치 라쿠자'(楽市楽座) 정책은 상인들에게 통행세나 좌(座) 제약 없이 자유롭게 장사를 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이 정책은 곧 ‘경제적 자유’라는 개념을 일본 도시에 최초로 도입한 것이었고, 오사카는 그 중심에 있었다. 이는 중세 일본 사회에 자생적으로 형성되던 '시장 자치의 이상'을 현실화시킨 사례이자, 상인을 하나의 시민 계급으로 대우한 선례가 되었다.
그 결과, 16세기 말의 오사카는 더 이상 군사적 요충지만이 아니었다. 물류, 시장, 신용, 정보가 결합된 복합적 경제 도시로 성장했고, 여기에 머무는 사람들은 ‘백성’이 아니라 ‘시민’에 가까운 자율성을 지녔다. 이것이 에도 시대에 오사카가 ‘천하의 부엌’이 될 수 있었던 전사(前史)다. 즉, 에도기의 상인 문화는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중세의 사카이, 오사카, 사찰 경제, 전란기의 상업 네트워크, 그리고 도요토미 정권의 상업 실험이라는 수십 년의 흐름 속에서 뿌리내린 것이었다.
상인의 기질은 이처럼 단지 장사꾼의 근면성만이 아니라, 시대를 읽고 체제에 맞는 생존 방식을 설계해낸 도시적 지능이었다. 오사카가 일본 중세의 어수선한 틈을 타서 ‘시장 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기질이 단지 경제적 선택이 아니라, 도시가 살아남기 위한 집단적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형성된 오사카의 상인 기질은 에도의 쌀값을 정했고, 메이지의 산업화를 유인했으며, 지금도 '도톤보리의 불빛' 속에 은은히 살아 있다. 상인은 떠났어도, 도시의 기질은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