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요시다이샤와 왕인묘
스미요시역에 내리면 바다 냄새보다 먼저 나무 냄새가 스민다. 전철 문이 열리는 순간부터 참나무 껍질과 젖은 흙, 오래된 사찰 지붕에 밴 송진 냄새가 코끝을 두드린다. 냄새를 더듬어 몇 걸음만 옮기면, 세 갈래로 갈라져 하늘을 짚은 거대한 참나무가 스미요시타이샤(住吉大社) 경내 중심에 서 있는 광경을 보게 된다. 이 나무 자리에 세워졌던 첫 신전은 백제식 기둥구조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1993년 보수 공사 때 드러난 기초 목재는 6세기 중반 백제 성왕 시기 연대를 가리키고, 기둥과 대들보를 잇는 ‘빗짜임’ 방식 역시 부여 지역 사찰 목곽과 일치한다. 신사는 이 사실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지 않았지만, 인근 주민들과 향토학자들 사이에서는 “우리 동네 삼신은 한반도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세대를 건너 전해지고 있다고.
스미요시라는 지명은 해변의 모래밭을 뜻하는 옛 일본어 ‘스미노에(住之江)’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지만, 불교사학자는 ‘스미’를 수미산(須弥山)의 음차로 보아 바다를 끼고 건너온 불교적 세계관을 짚는다. 경내에서 발굴된 기와 조각마다 연꽃잎이 겹쳐진 백제식 무늬가 도드라지고, 기와 끝에는 ‘南海’(난카이)라고 음각된 글자가 남아 있다. 무늬와 글자만으로도 이 신사가 해변과 바다, 그리고 바다 건너 사람들을 향해 열린 공간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신사 북쪽 모래사장에는 고구려계 ‘석실 봉토분’이 발견됐다. 해변 방파제 공사 중 노출된 무덤은 이미 훼손돼 내부 유물은 많지 않았지만, 석실을 덮은 둥근 천장과 방부제 역할을 하는 홍토(紅土)층은 평안도 의주 일대 고구려 고분과 일치했다. 파도를 맞는 최전선에 고구려 무덤, 그 안쪽에는 백제식 신사 건물—두 문화는 한 해변에서 충돌하기보다 공존한 셈이다.
스미요시 상점가 골목 끝 작은 ‘미카즈키모치(三日月もち)’ 가게는 매일 아침 백제 왕인의 도장을 본뜬 붉은 인장을 떡 위에 찍어 판다.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왕인 박사가 오사카에 한자를 전했다는 일화를 상품화한 셈인데, 관광객은 인장의 의미를 모르고 사 가지만 지역 주민은 물론 스미요시 초등학교 4학년 교과서에도 실린 이야기라 어린아이조차 제법 능숙하게 설명한다.
스미요시타이샤 경내에서는 매월 여러 마쓰리들이 개최되는데 일부 마쓰리에는 젊은 여성들이 오도리코(踊り子)가 되어 화려한 자수 의상을 입고 북 장단에 맞춰 행진한다. 그 북 리듬은 경기민요 ‘긴급다리’ 장단과 닮았다는 음악학자의 분석이 있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왕래하던 장인들과 사신들이 몸에 익힌 가락이 오늘도 모퉁이 상점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셈이다. 해변의 파도, 삼신의 북, 그리고 한반도에서 온 장단이 한 도시의 지층을 이룬다.
전철을 갈아타고 북동쪽으로 30분쯤 달리면 히라카타시(枚方市)에 닿는다. 승강장에서 내려 요도가와 둔치를 향해 걷다 보면, 왕인 박사 묘가 있다는 후지사카 언덕이 보인다. 실제 묘라는 증거는 없지만 『속일본기』에 “왕인의 후손이 이곳에서 제사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언덕 입구에는 공주에서 기증한 왕인문화축제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안내판에는 한국어 설명이 병기돼 있다. 매년 11월 ‘왕인제’가 열리면 공주의 자매도시 대표단이 부채춤과 사물놀이 공연을 펼치고, 일본 초·중학생들이 한글 이름표를 가슴에 달고 텟코츠(鉄鉢) 모양 떡을 나눠 준다. 일본식 행정구역 이름이 붙은 평범한 동네에서, 백제 문인의 이름이 국제 축제를 끌어내는 장면은 도시의 시간이 직선이 아니라 원을 그리며 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왕인묘에서 차로 15분 거리, 고마다(高麗田)는 고구려 후손을 뜻하는 ‘고마(高麗)’가 지명으로 남은 드문 마을이다. 이 지역에는 옛날 고구려계 이주민을 기린 작은 祠(호코라)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1960년대 철도 선로 확장으로 터가 사라지면서, 제단과 유물은 모두 자취를 감췄다. 지금은 마을회관 옆 작은 비석 두 기가 당시 존재를 암시할 뿐, 정식 신사나 제사는 이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주민들 사이에서는 “우리는 고마, 곧 고구려인의 후손”이라는 구전이 여전히 살아 있고, 동네 축제 때마다 이 비석 앞에 막걸리와 떡을 올리는 간소한 제례가 이어진다. 실물은 사라졌어도 이름과 기억이 남아, 골목은 여전히 과거와 현재를 느슨하게 잇고 있다.
스미요시에서 히라카타까지 이어지는 음식과 일상의 결 속에는 문헌으로 확인-가능한 한반도 흔적이 여전히 배어 있다. 20세기 전반까지 스미요시 해안 포장마차에서 팔리던 ‘이센요쇼쿠(一銭洋食)’—밀가루 반죽을 넓게 부쳐 채소·달걀을 얹은 한 장짜리 전병—은 오늘날 오코노미야키의 직접적 전신으로 여겨진다. 교토·오사카 양쪽에서 1910 년 무렵 이미 유행했다는 기록이 남고, 현재 교토 기온에 남은 전문점에서도 원형을 맛볼 수 있다.
전후(1940–50 년대) 오사카 이쿠노 코리아타운에 정착한 재일 코리안들은 이 전병 위에 고춧가루·김치 다진 속을 곁들이며 매운 ‘모단야키(Modern 焼き)’를 유행시켰고, 그 조리법이 오사카 시내 분식점으로 확산됐다는 식문화 연구가의 논문이 최근 발표됐다. 매콤한 김치 토핑과 짠맛이 강한 간장 베이스 소스가 결합하면서, 오코노미야키는 “달큰·매콤·짭짤” 삼중 구조를 갖게 되었고, 이는 오늘날 오사카 소스 음식의 표준 감각으로 자리 잡았다고 논문은 말한다. 밀가루 한 장 위에 얹힌 한국적 양념이, 모양은 일본 음식이지만 맛의 층위만큼은 국경을 건넜음을 보여 주는 사례다.
히라카타로 시선을 옮기면 음식 대신 강이 역사를 품는다. 요도가와를 따라 나 있는 40 ㎞ ‘수면회랑(みなも回廊) 자전거길’에는 에도 후기 삼십석(三十石) 객선이 정박하던 “히라카타 선착장(枚方船着場)” 유적이 복원돼 있다. 자전거로 달리다 보면 교토·오사카뿐 아니라 백제 왕인 박사를 기리는 ‘왕인묘’(후지사카)까지 이어지는 역사 루트를 한눈에 그릴 수 있다. 선착장 곁에는 19세기 선부(船夫)들이 부르던 ‘요도가와 삼십석 뱃노래(舟唄)’ 가사비가 세워져 있는데, “여울 따라 내려가 오사카에 닿는다”는 후렴이 지금도 관광선 스피커로 흘러나온다. 강변 물길과 노랫말이 과거 왕인 사절·고구려 이주민이 오가던 수로 기억을 지금도 호흡하게 하는 셈이다.
노을이 강물 위에 번질 무렵, 스미요시타이샤 경내에서는 여름 대제 ‘스미요시마쓰리’ 리허설로 ‘스미요시오도리(住吉踊り)’ 북소리가 울린다. 93명의 무용수가 흰 옷에 붉은 띠를 매고 다이코하시를 건너며 “야렛사ー”하는 추임새를 넣는 이 춤은 14세기 문헌에 첫 기록이 남아, 바닷길 안전을 기원하던 의식으로 전승된다.
한편 강 맞은편 히라카타 후지사카 언덕에서는 매년 11월 ‘박사 왕인 마쓰리(博士王仁まつり)’ 가 열려, 한국 전남 영암군 대표단과 지역 주민이 함께 헌화·시 낭독을 한다. 2024년 제41회 행사에는 영암군 부군수를 포함한 33명의 방문단이 참여해 “한–일 친선”을 다짐했다는 지방지 보도가 남아 있다. 여름밤 신사 종소리와 가을 언덕 마을 방송, 그리고 강 위를 스치는 노래비 멜로디가 서로 다른 계절·다른 문화권의 소리를 한 도시에 겹겹이 포개 놓는다. 스미요시의 파도와 히라카타의 강바람, 그리고 오사카 사람들이 보존해 온 축제의 음이 만나며, 오늘도 백제와 고구려의 기억은 생활 소리로 되살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