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인 박사, 오사카에 문자를 전하다

기록으로 건너간 문명, 한반도와 일본의 첫 문화 교류

by KOSAKA

문명의 시작은 ‘기록’에서 비롯되었다. 사람들이 사냥과 채집을 넘어서 정착하고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던 배경에는, 구전을 넘어선 문자의 발명이 있었다. 문자란, 단지 의미를 표현하는 부호체계가 아니라, 인간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기억을 저장하는 가장 정교한 도구였다. 그렇다면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에 이 문자가 처음 건너간 순간은 언제였을까?


그 첫 장면은 ‘왕인(王仁) 박사’의 일본 파견이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백제에서 건너온 왕인이 『논어』와 『천자문』을 전해 일본 학문과 문화의 기초를 닦았다고 전해진다. 이 전설은 단지 인물의 일화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문자라는 문명 기술이 해협을 넘어 전달된 역사적 순간이며, 동아시아 문명권 형성의 결정적 사건이었다.

일본서기 왕인.jpg 일본서기 제10권 중 왕인박사 관련 내용

720년에 완성된 이 일본의 정사(正史)는 왕인이 백제로부터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와, 당시 황태자였던 오진 천황(應神天皇)의 교육에 관여했다고 서술한다. 특히 오진 16년(서기 285년경) 혹은 405년경에 해당한다는 이 기술은, 왕인을 ‘학문과 문자의 전수자’로 기억하게 만든 결정적 단초다.


그러나 『고사기』에는 왕인이라는 이름이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고사기는 일본서기보다 앞선 712년에 편찬되었으나, 보다 신화와 혈통 중심의 서술에 치우쳐 있어 백제로부터의 문물 수용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언급이 적다. 반면 일본서기는 중국식 정사 체제를 모방하며, 정치사뿐 아니라 외국과의 문화교류까지 기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왕인의 존재는 일본 국가 정체성의 ‘근원적 학문’ 서사 안에 배치된 것이다.


한편, 한국측 사료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왕인이라는 인물에 대한 직접적인 기술이 없다. 이는 그가 백제의 지식인이었으며,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 그 행적이 오로지 일본 기록에 의존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 학계에서는 일본서기 내 기술이 문학적 창작인지 실존 인물의 묘사인지를 놓고 신중한 접근을 취한다. 특히 천자문은 중국 남북조시대 양나라의 주흥사(周興嗣)가 6세기경에 지었다는 것이 정설인데, 왕인이 4~5세기에 전한 것으로 나오는 일본서기의 기술은 시대적으로 모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에서는 왕인을 실존 인물로 보고 ‘문화수입의 상징’으로 적극 기념해왔다. 이는 근대 일본이 제국주의를 추진하면서 자국의 기원을 동아시아 문명과 연결하는 방식으로 문화적 정당성을 부여하려 한 결과이기도 하다. 왕인의 전래 시점을 서기 285년이나 405년 등으로 설정한 것도,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문화가 일방적으로 전파된 것이 아니라 당시 일본 조정이 주체적으로 외국문화를 수입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가 숨어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현대의 고고학 자료나 문헌사학 연구에서는 왕인의 존재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를 단일 인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당시 백제에서 일본으로 파견된 수많은 기술자와 문사 집단 중 하나로 보는 입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즉, ‘왕인’은 특정한 실존 인물이라기보다는, 문자와 문화를 전달한 백제 문인들의 상징적 표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한일 양국의 교과서 서술을 비교해 보면, 한국에서는 비교적 중립적으로 “백제의 문화를 일본에 전한 대표적 인물”로 서술하는 반면, 일본의 일부 교과서에서는 “귀화인(帰化人)으로서 일본 문화 형성에 기여”한 점을 강조하며, 왕인을 일본 문화 내부의 일부로 통합하려는 서술이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차이는 단순한 역사 서술의 문제가 아니라, 고대 문화교류의 주체성과 정체성을 둘러싼 양국의 인식 차이를 반영한다.


고대 백제는 이미 한자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토대로 정치와 종교, 외교의 언어를 정비한 나라였다. 고구려 출신의 고흥(高興)이 『신집』을 편찬한 것처럼, 백제에서도 사서 편찬과 유교 경전 연구가 활발했다. 당시 왜국은 아직 문자 체계가 확립되지 않은 상태였고, 하늘의 이치를 논하거나 법령을 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바로 이때, 왜의 요청으로 백제에서 파견된 인물이 왕인이었다. 『일본서기』에는 그가 『논어』 10권,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와서 무문(無文)의 나라에 학문을 가르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비록 오늘날 역사학계에서는 이 기록의 사실 여부를 놓고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지만, 이 일화가 일본 내에서 오랫동안 ‘문화의 기원’으로 인식되어 온 것은 분명하다.


왕인의 일본 내 활동은 오사카 동부의 히라노(平野) 지역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곳에는 현재까지도 ‘왕인신사(王仁神社)’가 남아 있으며, 매년 봄이면 벚꽃제와 함께 왕인을 기리는 제사가 열린다. 왕인신사 경내에는 ‘천자문’과 ‘논어’ 구절이 새겨진 비석이 줄지어 있고, 한글과 한자가 함께 병기된 안내문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이는 단순한 지역 유산이 아니라, 한반도와 일본이 ‘문자’로 맺은 첫 교류의 기억이 구체적인 공간에 각인된 예라 할 수 있다. 히라노는 고대 일본에서도 교통과 문화의 요충지였다. 야마토와 난카이도를 연결하는 내륙 교통로가 이곳을 통과했고, 바다 건너 백제와 신라의 유이한 문사들이 이곳에서 활동 기반을 닦았다는 설이 있다. 오늘날 오사카를 구성하는 핵심 구역 중 하나이기도 한 히라노는, 문자와 문화, 교류의 지층이 고스란히 겹겹이 쌓여 있는 도시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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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시 히라노구 소재 왕인신사

왕인이 전한 『논어』와 『천자문』은 단순한 학문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왕이 신하를 다스리고, 신하가 백성을 교육하며, 백성이 질서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도리’를 담은 텍스트였다. 특히 『천자문』은 1000자의 한자를 운율과 의미에 따라 정렬한 교육용 교재로, 일본 고대 귀족 사회에 급속히 퍼졌다. 이로 인해 ‘한문을 읽고 쓰는 법’이 귀족 지식인의 필수 소양이 되었고, 곧 고사기와 일본서기 등 일본의 고대 역사서가 한문으로 편찬되기에 이른다. 문자는 이렇게 정치, 종교, 사상, 예술의 토대를 이룬다. 그리고 그 출발점에 ‘왕인’이 있었다는 상징은, 일본에서 한반도의 존재를 문화적 뿌리로 인식하게 만든 중요한 요인이었다. 오늘날에도 일본의 고등학교 교과서 일부는 ‘왕인’을 ‘학문의 아버지’로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왕인 박사 전설은 한일 관계사의 해석에 따라 다양한 함의를 낳는다. 한국에서는 ‘문화 전파의 주체’로서의 자긍심을 강조하지만, 일본 내 일부 시각에서는 ‘외래문명 수용의 능력’을 부각하며 자국의 근대성과 연결하기도 한다. 또한 일본 우익의 경우, ‘왕인’을 ‘귀화인’으로 재해석해 천황제의 계보에 동화시키려는 시도를 보이기도 한다. 역사는 기억의 투쟁이다. 오사카의 왕인신사와 히라노 지역은 이러한 기억이 어떻게 정치화되고 문화화되는지를 보여주는 현장이다. 고대의 학자가 건넌 작은 문서 한 권이, 오늘날까지도 국가 정체성과 문화 정체성의 논쟁 한가운데 놓여 있는 것이다.


2023년, 필자는 오사카 부임 초기 히라노 왕인신사를 방문했다. 도시 외곽의 조용한 주택가 속에 위치한 이 신사는 소박하지만 단정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고, 마침 그날은 왕인제 전날이었다. 지역 주민들이 정성껏 준비한 제단 옆에는 『논어』의 구절들이 벚꽃 배경에 맞춰 전시되어 있었다. 문득, ‘한 사람의 기록이 얼마나 멀리 퍼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왕인은 한 나라의 경계를 넘어, 기록이라는 인간의 도구로 두 문명을 연결했다. 1500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다시 오사카를 걷는 이유도 그런 연결의 흔적을 따라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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