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위의 고대 교역로
세상에서 길은 두 가지 형태로 존재한다. 땅 위를 가르는 육로와, 물 위를 부유하는 수로다. 후자는 흔히 ‘길’이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지만, 고대 동아시아의 바닷길은 실로 정교한 노정이었고, 육로만큼이나 명확한 ‘교통망’이었다. 특히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잇는 해상 루트는 단순한 항로가 아닌 문명과 문화, 언어와 기술, 사람과 믿음이 오간 통로였다. 이 길은 일본의 고대 교통 체계인 ‘고도(古道)’ 가운데 ‘난카이도(南海道)’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기록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일본 내의 지정학적 구분이 아니라, 바다를 통해 한반도와 직접 맞닿았던 역사적 실체이기도 하다.
난카이도는 원래 일본의 일곱 가지 고도(五畿七道) 중 남부 해안을 따라 형성된 도로 체계였다. 기이(紀伊) 반도와 시코쿠 북부, 그리고 큐슈 동쪽 일부까지를 아우르는 이 노선은, 율령국가가 정비되던 7세기 전후의 일본에서 중요한 정치적·군사적 기능을 지녔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도(道)’라는 개념이 단순히 육상 도로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난카이도는 문자 그대로 ‘남쪽 바다의 길’이었으며, 오사카만에서 시코쿠를 거쳐 규슈에 이르는 해상 루트를 상징했다. 그리고 이 바닷길은 곧, 한반도의 남부 해안과 연결되는 고대 동아시아의 해양 네트워크였다.
한반도와 난카이도의 연결은 기록보다도 오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서기에는 4세기에서 5세기 무렵 백제, 신라, 가야 등의 사절단과 기술자들이 일본 열도에 도래한 기록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백제에서 건너온 왕인(王仁) 박사가 논어와 천자문을 전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이전부터 철기와 토기, 수공예 기술, 불교와 문자, 법률 체계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남부의 문물이 일본 열도로 건너간 사실은 고고학적으로도 풍부히 입증되고 있다. 그들의 항해는 오사카만으로 흘러들었고, 스미요시(住吉)와 난바(難波), 이즈미(和泉) 일대에 도착한 이후 내륙으로 연결되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고대 일본이 난카이도 지역을 ‘중계지’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오늘날 오사카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난바항은 이미 5세기부터 외국 사절을 맞이하던 공식 항구였으며, 이를 지키기 위해 시텐노지와 스미요시 신사가 설치되었다는 전설은 상징적이다. 단순한 신화적 서사가 아니라, 그곳이 바다를 통한 외교와 무역, 군사 전략의 중심지였음을 드러낸다. 바닷길을 따라 온 이들은 그저 손님이 아니었다. 그들은 정착했고, 정치를 보조했고, 기술을 이전했다. 때로는 일본 왕권의 건설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 바닷길의 실체를 실감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단서는 ‘도래인(渡来人)’이라는 개념이다. 도래인은 단순한 이민자가 아니다. 그들은 한반도와 중국 대륙에서 특정 기술과 지식을 지닌 채, 의도적으로 초청되거나 망명을 통해 일본에 도달한 전문가 집단이었다. 철기 제작자, 토목 기술자, 천문학자, 승려와 유학자, 장인과 건축가들. 이들은 바다 위의 난카이도를 통해 들어왔고, 교토와 나라, 오사카 일대에서 활약하며 일본의 고대 국가 체계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바닷길이란, 단순한 항해의 노정이 아니라, 삶의 기반을 옮기는 이주의 경로이자 문명의 전달선이었다.
바다는 단절된 공간이 아니다. 고대인에게 바다는 오히려 더 빠른 길이었다. 오늘날처럼 길이 나 있지 않은 내륙의 산악 지형보다, 바닷길은 직선적이며 예측 가능한 통로였다. 고대 한반도의 해상 교역도 마찬가지다. 전라남도와 경상남도의 여러 포구에서 출발한 배들은 대마도를 경유하거나, 남해를 가로질러 쓰시마 해협을 건너 오사카만으로 흘러들어갔다. 이런 움직임은 단순히 경제적 이익을 넘어서, 인류의 이주 본능과 결합한 문화적 흐름이었다. 바닷길은 생각보다 오래전부터 준비되어 있었고, 또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었다.
오늘날 오사카의 지명을 들여다보면, 그 흔적은 더욱 선명하다. 스미요시(住吉)는 바다의 신을 모시는 신사였고, 이즈미(和泉)는 ‘온화한 샘’이라는 이름 그대로, 교통과 물류의 요충지였다. 사카이(堺)라는 이름은 ‘경계’ 혹은 ‘접점’을 의미하며, 이는 육지와 바다, 일본과 외부 세계의 경계를 암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사카만은 일본 안쪽에서 바깥을 향해 열려 있는 입구이자, 한반도에서 바라보면 최초로 닿는 바다의 창이었다. 이런 지리적 상징성은 수백 년간 일본의 대외 창구로서 오사카가 기능한 배경이 되었다.
역사란 결국 사람의 이동과 정착의 기록이다.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난카이도의 해상 루트는 단순한 교역선이 아닌, 문명의 이식 경로였다. 한반도의 기술과 사상이 바다를 건너 일본 열도에 뿌리를 내린 과정은, 고대사뿐 아니라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종종 일본을 단일한 문화권으로 오해하지만, 실상 그 뿌리는 복합적이고 다층적이며, 한반도를 비롯한 외부와의 끊임없는 접촉을 통해 만들어졌다. 그 핵심에 바로 바다, 곧 ‘난카이도’라는 이름의 통로가 있었다.
오늘날 간사이공항에서 비행기를 타면 1시간 20분 만에 인천에 도착한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같은 바다를 건너 한반도와 일본은 수천 년간 이어져 있었다. 그 옛날 배를 타고 떠났던 항해자들, 한 줌의 기술을 지닌 채 바다를 건넜던 도래인들, 말은 통하지 않아도 손짓으로 무역을 나누던 상인들이 오간 길. 그것이 난카이도이며, 곧 오사카의 원형이다. 그 바닷길은 이제 고속철과 항공 노선으로 바뀌었지만, 그 정서적 거리만큼은 여전히 물결 위를 떠다니고 있는 듯하다. 오늘도 오사카의 바닷바람은 한반도를 향해 분다. 그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