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초, 한겨울 강풍이 불던 날씨 간사이공항에 발을 디뎠다.
파견 근무라 이름 붙인 여행, 여행가방과 업무용 서류가 전부였지만 도시에 내린 순간 머릿속은 전혀 다른 문장으로 가득 찼다. “오사카 근무중에 한일 수교 60주년을 맞겠구나”
숫자를 곱씹던 나는 곧 다른 숫자에 사로잡혔다. 여섯 개의 강줄기가 집중적으로 만나 삼각주를 이룬 땅, 바다와 강 사이에 떠 있는 섬 같은 도시, 오사카. 이곳을 가로지른 시간은 60년이 아니라 1 500년쯤 되지 않을까. 교과서 속 한-일 외교만 떠올리면 막연히 가까운 과거 같은데, 길을 걷다 보니 낯선 피돌기처럼 튀어나온 빛바랜 비석, ‘難波’ 두 글자가 새겨진 옛 다리 기둥이 내 계산법을 고쳐 놓았다. 길은 입을 다물고 있는데 풍경이 먼저 귀띔했다. 백제에서 건너온 왕인이 처음 글을 가르쳤다는 히라카타, 삼국사에만 존재할 것 같던 난카이도 바닷길, 신라사·백제사라 불렸으나 지금은 터만 남은 사찰, 그리고 조선통신사가 한겨울에도 대나무 돗자리를 깔고 시와 글씨를 주고받았던 나카노시마의 강바람까지.
업무는 매일 숫자를 다뤘지만 퇴근 후에는 늘 문장 속을 걷게 됐다. 강둑 위 공원 벤치에 앉아 있으면 고층 빌딩 유리창에 저녁 해가 비치고, 그 유리창 아래 흘러가는 물이 또다시 그 빛을 받아 반짝였다. 도시 자체가 거대한 만화경 같았다. 삼각주는 한쪽 눈에 오래된 흙을, 다른 한쪽 눈에 속도와 네온사인을 비춰 주며 “여기가 어디인지 직접 걸어 봐야 안다”는 묵묵한 조건을 내걸었다.
걷다 보니 한국이 자꾸 겹쳐 보였다. 쓰루하시 시장을 지나면 고춧가루 냄새와 쌀뜨물 냄새가 엉켜 고향 골목처럼 진했고, 구로몬 시장에선 오코노미야키 반죽을 뒤집는 소리가 마치 전 부치는 소리처럼 들렸다. “이 도시가 처음부터 한국을 품었던 건 아닐까?” 그런 물음이 생겼다. 기록과 통계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결론이었다. 그래서 매일 조금씩 노트에 적기 시작했다. 한쪽에는 물가 높이와 수로 폭 같은 숫자를, 다른 쪽에는 바람의 질감과 냄새의 겹침 같은 감각을. 숫자와 냄새가 한 줄 안에서 만나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이 글은 그렇게 두 해 가까이를 걸어 모은 발자국이다. 오사카라는 도시를 작은 대륙처럼, 하나의 두꺼운 기억층처럼 읽고 나면 그 아래에 흐르는 한반도의 시간을 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삼국의 사절이 건넌 바다, 전쟁의 상흔, 재일동포의 숨결, 한류의 빛바랜 네온까지—모두가 같은 도시 하늘 아래 포개져 있다.
그래서 나는 연필을 들고 묻는다. “도시는 언제부터 물을 기억했고, 우리는 언제부터 서로를 잊었을까.” 이 책이 그 질문에 대한 조용한 답변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