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그림은 나니와 삼각주와 다리·수로가 한눈에 보이는 그림으로서 에도 후기 만들어진〈浪花百景 · 天満橋〉라는 우키요에이다. 고대~근세 ‘물의 도시’가 가진 인상을 잘 시각화하고 있다.
오사카라는 도시를 이해하려면 이름부터 더듬게 된다. 한자로는 大阪·大坂·難波·浪速 등 여러 표기가 전해지지만, 발음은 ‘나니와’와 ‘오오사카’ 사이를 오가며 수천 년을 견뎠다. ‘難波’는 “험한 물가”, ‘浪速’는 “물결 빠른 곳”을 뜻한다. 왕권이 바다로 나아가는 관문이자 얕은 갯벌과 갈대밭이 뒤섞인 삼각주였음을 이름이 먼저 말해 준다. ‘大坂’은 흔히 “큰 비탈”로 풀이되지만, 실제로는 비탈보다 ‘둑’ 또는 ‘제방’에 가깝다. 물이 모여 쌓인 토사 위에 인공 구릉을 세워야 겨우 사람과 배가 머무를 수 있었던 땅, 그것이 오사카였다. 결국 서로 다른 글자들이 공통으로 품고 있는 단어는 물이다. 오사카는 처음부터 물과 싸우고, 물을 타고, 물을 길들여 생존한 도시였다.
요도가와와 오카와, 고쿠버리가와, 도톤보리천까지 오늘날 오사카 시를 관통하는 주수로는 여섯 줄기다. 그러나 고대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물길이 촘촘히 얽혀 있었다. 교토를 내려온 요도 강이 델타를 형성하며 수십 개 지류로 갈라졌고, 강어귀는 해마다 흙과 모래를 쏟아 내 삼각주를 키웠다. 사람은 흐름을 막고 길을 트며 물길을 새로 그렸다. 나라 시대 왕권은 이곳에 ‘나니와노쓰’라 불린 수도급 항만을 조성했다. 『일본서기』는 “於是百舩難波津ニ斉集ス”(난바에 수많은 배들이 모여든다)고 기록했는데, 바다와 강이 만나는 이곳에서 수백 척 배가 닻을 내리고 돛을 한꺼번에 올리는 장관이 궁정 기록관의 눈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수도로 실어나를 세금 쌀과 목재, 외국 사절단의 물자를 관리하던 이 항만이 곧 오사카 도시사의 출발점이었다.
헤이안 중기에 이르면 ‘쌀의 길’이 본격 가동된다. 교토와 나니와 사이 수로 운송이 국책이 되면서 운임은 육상 대비 절반 이하로 떨어졌고, 삼각주는 거대한 환적센터로 변신했다. 강 상류의 미스 갑문을 통해 수위를 조절해 곡물선을 사계절 띄울 수 있게 되자 요도 강은 말 그대로 경제 대동맥이 된다. 이즈음 난카이도를 왕래하던 백제와 신라 출신 장인들이 대규모 제방 공사와 선박 제작에 투입됐다는 기록이 일본 측 『속일본기』와 한반도 측 『삼국사기』에 나란히 남아 있다. 신라 장인이 만든 ‘신라 지석 제방’ 유구가 20세기 발굴조사로 확인되면서 문헌은 유적으로 증명되었다. 강과 바다의 경계를 직선으로 재단하고 인공 섬을 확장한 그들의 솜씨 덕분에 오사카의 니시요도가와·미나토 같은 지명은 지금도 ‘항구’의 뉘앙스를 품고 있다.
16세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사카성을 축조하며 ‘하리호리’라 불린 대수로 파기를 단행한다. 성 방어를 위해 거대한 해자를 두르고, 남쪽 늪지대를 메워 신시가지를 열었다. 이때 생긴 인공 제방과 매립지가 오늘날 혼마치·도톤보리 같은 상업 지대를 형성했다. 제방 이름은 직업과 기능을 담은 골목 명으로 이어졌다. ‘자자혼마치’가 냄새 강한 생선류를 잡다한(雑喉) 상품과 함께 팔던 어시장이었고, ‘도묘지’는 토사와 흙을 쌓아 올린 신사터였다. 물길이 바뀔 때마다 지명은 바뀌었지만, 삶과 물의 밀착성은 변하지 않았다.
물의 도시가 살아남으려면 재해를 견뎌야 했다. 에도 중기 오사카 부교가 남긴 기록에는 “밤사이 호우가 이어지면 새벽엔 소금물이 집 안 깊숙이 들어왔다”는 기록이 반복된다. 동시에 “새 갑문 덕분에 피해가 절반으로 줄었다”는 구절도 뒤따른다. 오사카부가 현재 관리하는 수문은 600개 이상, 세계에서 가장 촘촘한 방재 인프라다. 메이지 정부가 추진한 방수로 공사는 요도 강 옆에 거대한 우회 수로를 만들어 홍수를 바다로 흘려보냈고, 그 자리에 신오사카역·컨테이너 야적장이 들어섰다. 지금도 강변을 걷다 보면 19세기 말 일본수로청 로고가 새겨진 낡은 콘크리트 점검구가 불쑥 모습을 드러낸다. 물을 다스리는 기술이 곧 도시를 지탱하는 역사의 층위임을 말없이 증언한다.
강은 도시의 도로이자 교실이었다. 상류 목재를 실어 나르던 통나무 뗏목 ‘이카다’는 자리마다 세금을 매겼고, 물길이 틀어질 때마다 새로 납세권이 부여됐다. 이 과정에서 지방 호족이나 절은 수로 생산물을 기반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이후 ‘상인 도시 오사카’를 상징하는 사고방식, 즉 “빚보다 신용”이라는 윤리가 태동한다. 강바닥에서 시작된 경제 조직이 육상 시장으로 이어지고, 최종적으로는 도톤보리·구로몬 시장·쿠시카츠 골목 같은 혈관으로 번져 나간 것이다. 사람들은 흙 위에서 살지 않고 물 위에서 살았기에 재화를 이동시키는 원가 의식이 몸에 배었다. 그 결과 오사카 상인은 타 지역보다 훨씬 일찍 현금 결제, 회전율, 가격 경쟁이라는 개념을 체득했다. 도시는 물을 타고 형성됐고, 물이 재화와 사람, 사상을 끌고 왔다.
오늘날 나카노시마 공회당 앞 다리에 서면, 한쪽으론 유리벽 고층 빌딩이 강물을 비추고 다른 쪽으론 1918년식 네오바로크 건물이 붉은 벽돌을 드러낸다. 그 사이를 흐르는 오카와 강은 장마철이면 여전히 흙빛으로 넘실거린다. 밤이면 강가 카페들이 불을 밝히고, 바람이 불 때마다 물비린내가 은은하게 퍼진다. 대도시의 세련된 스카이라인도, 네온사인도, 고속도로 고가도 물 위에 투영된다. 나는 호흡을 고르고 ‘大坂’ 두 글자를 마음속에 떠올린다. 구릉이 아니라 둑이라는 숨은 뜻, 물과 평지 사이에 얹힌 인간의 간섭을 암시하던 옛 이름 말이다. 삼각주 끝 모래톱에서 백제계 장인이 돌을 다듬던 망치소리, 조선통신사 사졸이 노를 저으며 강어귀로 들어오던 물살 소리, 공습 뒤 먹구름 사이로 피어오른 검은 연기, 그리고 신칸센이 다리를 가르며 내는 쇳소리까지—모두가 시간이 다른 물결처럼 겹쳐 들린다. 이 도시를 관통해 온 가장 오래된 메시지는 결국 한 문장으로 수렴된다. 도시는 물을 기억하고, 물은 도시를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