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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Jul 30. 2024

유병록 《안간힘》

살아지면 살아내야 해요, 라는 내 말의 무게의 헛헛함을 떠올리며...

  “아들은 작은 관에 담겼다. 차가운 몸으로 누워 있었다. 나는 아들을 태운 차에 함께 타고 화장장으로 갔다. 예정된 시간이 될 때까지 아들은 차에 타고 있었다. 다른 가족들은 모두 대기실로 보내고, 나는 아들이 탄 차를 빙글빙글 돌았다. 그리고 잠을 자지 않고 보챌 때마다 부르던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우리 아들 잘 잔다, 유준현 잘 잔다, 우리 아들 잘 잔다, 유준현 잘 잔다······. 이제 다시는 불러주지 못할 그 노래를, 아들에게 들려주었다. 얼마 후, 아들은 한 줌의 가루가 되었다. 다시는 만지지 못할 몸이 되었다.” (pp.18~19)


  ‘안간힘’이라는 제목에 이끌렸다. 어떤 의지의 추동이 아니라 무지막지한 책임에 의하여 굴러가는, 그렇게 구르고 구르다가 구른다는 행위만 남고 많은 것이 사라진 시간들, 그 시간들을 근근이 이어 붙여 놓은 것을 삶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나, 의구심으로 가득한 채로도 이토록 촘촘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구나, 희안한 움직임과 조바심 가득한 냉소가 나를 표상하고 있는 참이었다.


  “아들을 품에 안고, 할아버지의 산소로 갔다. 아버지와 장인 어른 두 분만 아들의 유골함을 들고 산으로 향했다. 울며불며 고집을 부렸지만, 유골을 뿌린 곳을 알면 내가 자꾸 그곳을 찾아올까봐 걱정스럽다며 모두들 만류했다. 나는 두 분이 아들의 유골을 뿌리고 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잘 있으라는 인사를 남기고 그곳을 떠났다.” (p,19)


  나의 ‘안간힘’이 이제 사라지려고 하는 나의 부모로부터 기인한 것이라면 저자의 ‘안간힘’은 이제는 사라진 그의 자식을 기원으로 한다. 어쩌면 이 둘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지 모른다. 참척이라는 단어는 있지만 자식을 잃은 이를 지칭하는 단어는 아예 발생하지도 않은,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나는 늙은 고아가 되겠지만 저자는 이름 없이 늙어갈 것임으로, 두 ‘안간힘’ 사이의 간극은 꽤나 처참하다.  


  “그렇다. 나는 아들의 장례를 치르는 하루 반나절 동안 무려 세 끼를 챙겨 먹었다. 지금 생각해도 치욕스럽다. 아들에게 미안하다. 그러나 주변의 조언을 따르지 않고, 한 끼도 먹지 않고 식음을 전폐했다면 어땠을까. 치욕스러움이야 덜했겠다. 그러나 그 거대한 슬픔을 내보낼 힘을 끝내 잃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더 큰 치욕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p.20)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무거움이 사라질만큼의 무게감으로 읽어냈다. 책을 모두 읽고 난 다음에 무언가를 적어야 한다는 기력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지치기도 하였다. 아주 많은 것을 뛰어넘는 삶이라는 것, 죽고 싶다는 나의 부모님을 향하여 내가 건넸던, 어쩔 수 없어요 살아지면 그냥 살아내야 해요, 라는 말의 헛헛한 무게가 나의 짙은 그늘 안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치욕스러움에 사무치는 때가 있다. 밥을 먹는 게 치욕스러울 수도 있고, 잠을 자는 게 끔찍할 때도 있다. 사는 게, 인생이라는 게 치욕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러나 견뎌야 한다. 그 치욕을 견디고 살아가야 한다. 치욕을 견디고, 나아가 치욕의 힘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 치욕스럽다는 이유로 더 소중한 것을 잃어서는 안 된다. 치욕스럽다는 이유로 소중한 것을 더 잃어서는 안 된다.” (pp.20~21)


  처참한 책의 전반부를 지나면 그제야 저자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조용히 떠올려 보게 된다. 그는 어쩌면 아주 고지식한 부끄럼쟁이일 수 있다. 그는 어지간해서는 스스로가 만든 난처한 지경에 빠지지 않는 사람일 것 같다. 글을 다루는 사람임에 분명하고 그래서 어떠한 경우에도 글을 통하여 자신을 바라보는 일을 멈출 수 없었음을 온당하게 이해할 수 있다. 


  “쑥스러움은 대개 좋아하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생겨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에 대해 칭찬할 때, 또는 내가 좋아하는 상대를 칭찬하거나 고마움을 이야기할 때 생겨난다. 물론 다른 사람이 나를 칭찬하거나 누군가 나에게 고마움을 표시할 때야 어느 정도 준비가 되어 있다. 상대의 말에 대해 감사해하면서도 손사래를 치거나 적당한 웃음을 짓는다면 곧 쑥스러움은 사라진다. 쑥스럽게 왜 그러느냐고 말하며 쑥스러움을 물리칠 수 있다. 정말 곤란한 일은 내가 누군가에게 감사 인사를 해야 할 때이다. 웬만한 감사 인사야 가볍게 해낼 수 있다. 하지만 진심에서 우러나온 감사의 인사를 해야 할 때는 쑥스러움이 너무 커서 어쩔 줄 몰라 한다.” (pp.111~112)


  어제 아버지는 엄마가 계신 요양병원으로 모셔졌다. 삼 개월 전에 아버지는 병실에 올라간 지 삼십 분이 되지 않아 병원 관계자들에 의하여 퇴실 조치된 적이 있다. 아버지와 엄마는 이인실에 함께 계시기로 하였다. 저녁에 엄마는 내게 전화하여 아버지의 높은 혈압 수치를 알려왔다. 그 정도로는 저를 놀라게 할 수 없어요 엄마라고 속으로 말했고, 거기가 병원이에요 엄마, 알아서 조치를 할 거예요, 라고 말했다. 뭔가 또 다른 국면이 시작되려고 함을 알 수 있었다.


  “... 글을 쓰고 책 만드는 일을 하는 나는 늘 말을 정확하고 바르게 쓰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되도록 쓰지 않으려고 하는 말도 몇 가지 있다... 미안한데,라는 말은 되도록 쓰지 않으려고 한다. 그 말은 앞으로 당신에게 미안해질 말을 할 테니 감안하고 들으라는 말처럼 느껴진다. 얼마쯤은 폭력적인 느낌마저 들어서 되도록 쓰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이라는 말도 그렇다.... 솔직하게 말하면,이라는 불필요한 말로 솔직함을 드러낼 수 없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상대가 오해하지 않게 하려면 정확하고 따뜻하게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오해하지 말라는 말 한 마디로 상대가 오해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괜스레 불쾌감만 높일 뿐이다... 농담이야,라는 말도 쓰지 않으려 노력한다. 이 말은 보통 다른 사람의 기분을 불쾌하게 해놓고 수습하려 할 때 자주 쓰인다. 농담은 상대와 함께 웃자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농담을 해서 상대가 함께 웃지 않고 불쾌함을 느꼈다면 그것은 실패한 농담이다. 그러므로 그때 농담이라고 말해봐야 무의미하다...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던진 말에 상대가 불쾌감을 느낀다면, 그때는 미안하다고 말해야 한다.” (pp.184~186)



유병록 / 안간힘 / 창비 / 211쪽 /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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